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3145 추천 수 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우리말에 대한 반성

     막가파 용어 - 전쟁과 파괴의 시대

  최근 "가격 파괴"라는 말이 등장하더니 "파괴"가 무슨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인사 파괴, 학력 파괴, 자연 파괴" 등이 그런 유형이다. 가격을 파괴한다는 건 값을 대폭 낮춘다는 뜻이니 소비자 측에서 보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반 소비자를 대변하는 언론 매체가 이를 대서특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런데 이 말은 일본에서 먼저 사용했다 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꼭 그런 극한 용어를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 본다. 파괴는 글자 그대로 때려 부수거나 깨뜨려 버린다는 뜻이다. 새로운 건설을 위한 것일지라도 파괴에는 폭력이 수반되고 그 이전에 과거부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가격을 낮춘다면 낮출 만한 여건이 충족되었을 것이므로 그저 낮춤이나 하락 정도로 족할 터이다. 개선이나 개혁을 위한 여건 조성이라면 몰라도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는 기존의 모든 질서나 관행, 또는 미풍 양속마저도 깡그리 파괴하려 덤빌지 모르겠다.

  "전쟁"이라는 말도 전천후 용어가 된 지 오래다. 한때 전직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적도 있지만 뭔가 좀 강조할 일이 있다 싶으면 시도때도 없이 전쟁을 선포하곤 한다. 적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 전쟁이라면 범죄와의 전쟁은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 "예매전쟁, 입시전쟁, 귀가전쟁, 주차전쟁" 등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부분까지도 이런 용어를 쓰는 건 좀 심하지 않을까 게다가 교통 문제에서는 전쟁만으로 마음에 차지 않았던지 지옥이나 대란이라는 용어도 서슴지 않는다. 전쟁, 전투, 투쟁 등 싸움 용어에 관한 한 북한을 따르기는 어려울 게다. 언어를 이데올로기의 선전 수단으로 이용하는 북한에서는 모내기도 전투요 수술도 전투라고 한다. 삿대질도 "손가락 총알"이라 하고. 몸의 살을 빼는 일도 "몸깐다"고 말한다. 툭 하면 까부시고 떨쳐나서고 얼떠 나서라고 선동한다. 그런데 근묵자흑이라고 했던가, 우리도 어느새 북한의 그것을 닮아 가는 듯하다.

  이런 풍조가 특히 젊은 세대에서는 호응을 얻는 듯 하여 더욱 염려스럽다. 이들에게 기성세대는 타도의 대상이요, 기존의 사고나 관습은 타파의 대상이다. 잘못된 고정관념은 깨뜨려야겠지만 때로 정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이들이 애용하는 언어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슨 일이든 화끈하게 끝내 주는 해결사가 선망의 대상이다. 돈을 벌어도 한목에 싹쓸이해야 하고 망해도 일시에 왕창 망한다. 이들이 쓰는 말 가운데  "온통, 왕창, 몽땅, 깡그리, 싹쓸이"라는 수식어를 얹어 "끝내 준다, 끝장 낸다, 엄청나다, 기똥차다, 까무러치다, 댓길이다, 죽여 준다" 등등의 서술어가 예사롭게 쓰임도 역시 예삿일이 아니다. 이런  극단적 용어가 욕구 불만에 가득 찬 이들의 정서를 만족시키는(?) 어휘 목록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언어 폭력 시대라 아니할 수 없다.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언어도 함께 타락하게 마련이다. 공자님도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언어가 불순해지고(명부정 즉언불순), 언어가 불순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언불순 즉사불성)고 했다. 실력이라는 말도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본뜻을 잃어  가고 있다. 하나의 법안 개정을 두고 여당은 이를 실력으로 통과시키려 하고 야당은 실력으로  저지하려고 한다. 실력이 실제의 역량, 곧 개인이나  집단이 가진 진정한 힘을 말할진대 여기서  말하는 실력은 아무래도 불법이나 폭력을 뜻하는 말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의회 정치를 표방하는 우리 국회에서 여야 공히 진정한 실력 행사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실력이라는 것이 여당 측에서는 날치기를 뜻하고 야당 측에서는 무슨 아우성이나 폭력을 뜻한다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우리 정치의 "정"이 바른 길, 곧  정을 향해 걸어왔다면 이 말이 이렇게까지 변질되지는 않았으리라.

  신문 사회 면에는 "기관원 사칭"이라는 기사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기관원은 말 그대로 어떤 기관에 종사하는 구성원을 이름이다. 예컨대 학교 선생님은 교육기관원, 은행원은 금융기관원, 신문 기자는 언론기관원이라 부를 수 있다. 한때 힘깨나 썼다는 정보 기관원만을 굳이 기관원이라 칭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유행했던 "운동권"이라는 말도 같은 유형에 속한다. 운동권 학생이 학업보다는 운동(스포츠)에 전념하는 학생을 지칭하는 말은 아닐 게다. 그 운동이라는 게 사상이나 정치 운동을 뜻하는 말이겠지만 어떻든 무언가 잘못된 이 시대 이 사회가 이런 기형어를 양산하고 있다.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우리 사회, 우리  정치의 형태가 어딘가 잘못되었더라도 언어만은 곱고 바른 말을 사용해야겠다. 파괴, 전쟁,  타도 등의 폭력적인 언사는 자제해야겠고, 실력은 결코 불법적인 폭력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능력을 뜻하는 말로 제자리 매김해야겠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1 모주 바람의종 2008.05.03 3901
120 노름 용어 - 고스톱 왕국은 피바가지 바람의종 2008.05.05 2879
119 문래 바람의종 2008.05.05 2944
118 음식 이름 - 족발, 주물럭, 닭도리탕 바람의종 2008.05.06 3212
117 가족 호칭어 - 며느리와 새아기 바람의종 2008.05.08 3607
116 보은단 바람의종 2008.05.08 2804
115 된소리 현상 - 꿍따리 싸바라 빠빠빠 바람의종 2008.05.10 3231
114 형벌 관련 욕설 - 오라질 년과 경칠 놈 바람의종 2008.05.11 3999
113 망나니 호칭 - 지존이 무상하다 바람의종 2008.05.12 3759
» 막가파 용어 - 전쟁과 파괴의 시대 바람의종 2008.05.23 3145
111 지명 속담 - 보은 아가씨 추석비에 운다 바람의종 2008.05.29 3549
110 지명어의 작명 -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 바람의종 2008.06.02 3447
109 잃어버린 지명 - 아름다운 이름, 보은단, 고운담 바람의종 2008.06.03 3048
108 신도시의 이름 - 일산과 김정숙군 바람의종 2008.06.22 3450
107 전철역의 이름 - 향토색 짙은 서울 역명 바람의종 2008.06.24 3740
106 서울과 한강 - "아리수"가의 새마을 바람의종 2008.07.12 2793
105 인명의 작명 - 이름을 불러 주는 의미 바람의종 2008.07.18 2768
104 고유어 인명 - 돌쇠면 어떻고 개똥이면 어떤가 바람의종 2008.07.19 3920
103 여성의 이름 - 언년이, 영자, 정숙, 한송이 바람의종 2008.07.21 3325
102 어느 여인의 이름 - 최초로 이 땅에 시집 온 여인 바람의종 2008.07.24 3572
101 백령도와 심청 - 흰 새가 일러 준 기다림의 섬 바람의종 2008.07.26 2879
100 강화와 마리산 - 반도 한가운데 솟은 머리산 바람의종 2008.07.28 2917
99 김포와 휴전선 - 애기봉에 울려퍼지는 어울림의 합창 바람의종 2008.07.29 3119
98 철원과 한탄강 - 큰 여울 줄기 따라 한탄의 전설이 바람의종 2008.07.31 4437
97 춘천과 의암 - 맥국의 맥이 흐르는 쇠머리골 바람의종 2008.08.03 4716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Nex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