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180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퇴화되는 표현들

많고 적음을 알게 하는 ‘양의 세계’는 숫자나 수관형사 그리고 수량단위의 결합으로 나타낸다. 수량단위는 보통사람들이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를 전문적인 단위들도 있지만 반대로 일상생활에서 긴요하게 쓰이는 단위들도 퍽 많다. 가장 흔한 것이 아마 개수를 일컫는 ‘개’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세는 ‘명’과 ‘사람’, 동물을 세는 ‘마리’, 장소를 세는 ‘군데’, 책을 세는 ‘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언제부터인지 이 수량단위가 점점 단순해지고 있다. 책을 ‘한 개, 두 개’ 하며 세는 것도 퍽 흔해졌고, 식당에서 “맥주 다섯 개요?” 하고 되묻는데 아무도 이상해하는 것 같지가 않다. “쟤네 집에는 차가 세 개나 있대”라는 말도 퍽 흔히 듣는다. 그러다 보니 “잠시만요, 담배 한 개 사올게요”에서의 ‘개’와 “하루에 담배를 스무 개나 피워요?”에서의 ‘개’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다. 수량과 관련된 정보 교환이 점점 성글어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이와 함께 수량단위와 함께 쓰이는 수관형사 ‘한, 두, 서(석), 너(넉) …’에서도 ‘서(석)’와 ‘너(넉)’를 들어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이미 장년층에서조차 ‘종이 석 장’과 ‘볼펜 넉 자루’를 각각 ‘세 장’과 ‘네 자루’라고 말한다. 볼펜은 아예 ‘네 개’라고 하는 표현이 더 많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해도 그 불편함이나 어색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어느새 대세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오래된 언어는 장구한 세월 유지해온 정교한 틀이 있다. 거추장스러워 보이면서도 언어의 완결성과 자기다움을 보여주던 장치였다. 삶의 속도와 효율성 추구는 이러한 불필요한 듯하면서도 자기답게 만들어주던 장치와 장식을 용서 없이 팽개치고 있다. 의미와 용법의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 한, 편리함과 간결함을 기준으로 언어의 모습을 거침없이 탈바꿈시키고 있다. 언어도 일회용 소모품이 되어 가는 느낌이다.

………………………………………………………………………………………………………………

존댓말과 갑질

존댓말은 서로 예절을 지키며 용건을 해결해 나가는 사회적 도구이다. 옛날에는 서로의 지위, 계층, 연배의 차이를 구별하던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서로 사적이 아닌 공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매우 유용한 언어 용법이 되었다. 그래서 나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도 존댓말을 씀으로써 오히려 품격을 지키게 되고 공공의 소통을 더욱 객관화하는 훌륭한 언어 교양이라고 할 수 있다.

메르스라는 질병으로 온통 정신이 없는 요즘 어떤 방송에서 다시 한번 언어와 교양 문제를 돌이켜보게 하는 보도가 있었다. 어느 공기업의 직원이 메르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마스크를 벗으라고 요구했고 이에 불응하자 해고했다는 내용이었다. 해고당한 사람은 강력히 항의했지만, 담당 직원은 마스크가 (외국 손님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 있다며 “마스크를 착용하면 통역을 하고 도와드려야 하는데 의사소통이 잘 안되니까 혹시 마스크 착용을 안 해도 (되겠냐) 정중하게 부탁을 드렸거든요”라고 했다고 한다.

이 보도가 정확한 사실에 근거했다면, 여기서 ‘정중하게 부탁’을 드린 말은 분명 존댓말의 형식일 것이다. 권력의 우위를 차지한 사람이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 존댓말로 정중하게 ‘부탁’을 한다는 것은 사실 ‘명령’을 내렸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 명령은 함부로 내뱉은 지시보다 더욱더 강력하다. 논리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저항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지기 때문이다.

존댓말이나 언어의 정중함이 권력의 비대칭과 이에 따른 권력의 일방적 관철을 드러내는 ‘갑질’과 연관될 때는 그 말의 우아함과 품위는 도리어 칼날 같은 흉기가 될 수도 있다. 말을 곱게 가다듬는 일보다 모두의 사회적 관계를 품위 있게 발전시키는 일이 더욱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정당성은 모든 개인을 보호해줄 수 있는 언어적 민주주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1. No Image notice by 바람의종 2006/09/16 by 바람의종
    Views 29383 

    ∥…………………………………………………………………… 목록

  2.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3. No Image notice by 風磬 2006/09/09 by 風磬
    Views 191004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4. No Image 06Sep
    by 風文
    2021/09/06 by 風文
    Views 719 

    딱 그 한마디

  5. No Image 05Sep
    by 風文
    2021/09/05 by 風文
    Views 632 

    선교와 압박

  6. No Image 05Sep
    by 風文
    2021/09/05 by 風文
    Views 647 

    또 다른 이름

  7. No Image 03Sep
    by 風文
    2021/09/03 by 風文
    Views 1106 

    옹알이

  8. No Image 03Sep
    by 風文
    2021/09/03 by 風文
    Views 493 

    잡담의 가치

  9. No Image 02Sep
    by 風文
    2021/09/02 by 風文
    Views 677 

    언어 경찰

  10. No Image 02Sep
    by 風文
    2021/09/02 by 風文
    Views 862 

    대명사의 탈출

  11. No Image 20Jul
    by 風文
    2020/07/20 by 風文
    Views 2185 

    말의 토착화 / 국가와 교과서

  12. No Image 19Jul
    by 風文
    2020/07/19 by 風文
    Views 2657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다르게 생각해야 '물건'이 보인다

  13. No Image 19Jul
    by 風文
    2020/07/19 by 風文
    Views 2189 

    사라진 아빠들 / 피빛 선동

  14. No Image 19Jul
    by 風文
    2020/07/19 by 風文
    Views 2535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아이디어도 끈기다

  15. No Image 18Jul
    by 風文
    2020/07/18 by 風文
    Views 1960 

    건강한 가족 / 국경일 한글날

  16. No Image 17Jul
    by 風文
    2020/07/17 by 風文
    Views 2455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포도밭의 철학

  17. No Image 16Jul
    by 風文
    2020/07/16 by 風文
    Views 2262 

    '명문'이라는 이름 / 가족의 의미

  18. No Image 15Jul
    by 風文
    2020/07/15 by 風文
    Views 2386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대기업은 싫습니다

  19. No Image 15Jul
    by 風文
    2020/07/15 by 風文
    Views 1873 

    포퓰리즘 / 특칭화의 문제

  20. No Image 14Jul
    by 風文
    2020/07/14 by 風文
    Views 2422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아이들은 잡초처럼 키워라

  21. No Image 14Jul
    by 風文
    2020/07/14 by 風文
    Views 1853 

    '사과'의 참뜻 / 사람의 짓

  22. No Image 12Jul
    by 風文
    2020/07/12 by 風文
    Views 1791 

    방언 분투기 / 국민 정서

  23. No Image 10Jul
    by 風文
    2020/07/10 by 風文
    Views 1867 

    배제의 용어, '학번' / '둠벙'과 생태계

  24. No Image 09Jul
    by 風文
    2020/07/09 by 風文
    Views 1978 

    언어로 성형수술을 / 위계질서와 개인정보

  25. No Image 08Jul
    by 風文
    2020/07/08 by 風文
    Views 1683 

    눈으로 말하기 / 언어와 민주주의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