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10.04 06:17

큰 소리, 간장하다

조회 수 89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큰 소리

나는 목소리가 작고 가늘다. 마초처럼 안 보이는지 상대방에게 별다른 경계심을 사지는 않는다. ‘말발’이 잘 안 먹히는 게 문제이긴 하다. 주요 인물이 아닐 듯하고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고나 할까. 뭐, 어떠랴, 틀린 말도 아니니. 말수도 적은 편이라, 그야말로 ‘민주평등사회’에 어울리는 목소리이다.

나는 목소리가 큰 것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 내 얘기가 타인의 공간으로 넘어가는 건 싫다. 친구의 목소리가 높아지면 남이 들으니 작게 말하라 한다. 반면에 타인의 큰 소리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뿐더러 즐기기까지 한다. 모르는 사람이 거침없이 떠드는 걸 듣는 게 좋다. 버스에서 딴 사람도 들리게 ‘혼잣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행운이다. 영화를 보며 “어이구, 거길 왜 또 들어가!” 하며 안타까워하는 어르신의 외침은 얼마나 정겨운지.

그 사람들은 왜 ‘공공장소’에서 크게 말을 할까 궁금하다. 하지만 정말 궁금한 건 따로 있다. 왜 우리는 큰 소리로 말하는 걸 ‘무례함’이나 ‘무식함’이라는 가치판단과 연결시키는 걸까? 때와 장소를 가려 목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건 현대인이 갖춰야 할 예의범절이라고 보는 것일 텐데, 그런 감각의 출처는 어딘가? 식당에서 잠시 앉는 자리처럼 시시때때로 생기는 사적 공간은 정말로 나만의 공간인가? 큰 소리는 그 공간을 침범하는 게 분명한가?

사회질서가 무서운 건, 그것이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를 한덩어리로 구조화함으로써 이 세계를 유일하고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점이다. 나는 나의 이 얄팍한 감각이 의심스럽고 마음에도 안 든다.


간장하다

접시에 초밥을 얹어주며 주인장은 ‘짭짤하니 간장하지 말고 먹으라’고 한다. ‘간장을 찍다’는 뜻일 텐데, 초밥집이 아니라면 알 수 없었을 거다. 어느 고깃집 외벽에 굵은 글씨로 ‘고기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흐음, 고기를 먹으라는 뜻이렷다.

영어에는 명사였던 단어가 꼴바꿈 없이 그대로 동사로 쓰이기도 한다. ‘fish’는 ‘낚시를 하다’, ‘e-mail’은 ‘이메일을 보내다’라는 뜻인데, 그 명사로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bus’는 ‘버스로 이동하다’, ‘text’는 ‘문자를 보내다’라는 식.

한국어는 ‘하다’를 붙여야 한다. ‘공부하다, 운동하다’처럼 앞말에 대부분의 뜻이 담겨 ‘하다’가 할 일이 크게 없는 경우가 많지만, ‘나무하다’나 ‘밥하다’처럼 사물 명사가 오면 달라진다. ‘땔감을 마련하다’, ‘밥을 짓다’라는 뜻을 가지니 말이다. ‘약하다’는 ‘마약을 복용하다’, ‘머리하다’는 ‘머리를 다듬다’, ‘한잔하다’는 ‘한잔 마시다’를 뜻한다. 가만히 보면 그 행동과 결부된 사회문화적 관행과 연결되어 있다. ‘나무하다’가 나무를 심거나 나무로 뭔가를 만드는 게 아니라, 땔감을 마련한다는 뜻인 것도 나무를 ‘땔감’으로만 대했던 시대상황과 닿아 있겠지.

맥락에 따라 다른 뜻을 갖기도 한다. ‘선물로 귀걸이했어’와 ‘귀걸이하고 권투를 했어’가 다르듯이, ‘저녁해 놓았어’라는 말에 ‘저녁하고 들어갈게’라 답하면 싸움이 날 듯. ‘택시하다, 버스하다’가 노동자에게는 운전으로, 사장에게는 회사운영으로 읽히는 걸 보면, 말 속에는 사람이 들어앉아 있는 게 분명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29106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75973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190724
3300 ‘평어’를 쓰기로 함, 심심하다 風文 2022.11.23 1186
3299 열쇳말, 다섯 살까지 風文 2022.11.22 968
3298 만인의 ‘씨’(2) / 하퀴벌레, 하퀴벌레…바퀴벌레만도 못한 혐오를 곱씹으며 風文 2022.11.18 769
3297 독불장군, 만인의 ‘씨’ 風文 2022.11.10 984
3296 몸으로 재다, 윙크와 무시 風文 2022.11.09 736
3295 환멸은 나의 힘 / 영어는 멋있다? 風文 2022.10.28 799
3294 “힘 빼”, 작은, 하찮은 風文 2022.10.26 717
3293 ‘시끄러워!’, 직연 風文 2022.10.25 830
3292 이름 짓기, ‘쌔우다’ 風文 2022.10.24 823
3291 국가 사전을 다시?(2,3) 주인장 2022.10.21 759
3290 납작하다, 국가 사전을 다시? 주인장 2022.10.20 1055
3289 자막의 질주, 당선자 대 당선인 風文 2022.10.17 743
3288 부동층이 부럽다, 선입견 風文 2022.10.15 811
3287 정치와 은유(2, 3) 風文 2022.10.13 727
3286 ‘~면서’, 정치와 은유(1): 전쟁 風文 2022.10.12 871
3285 안녕히, ‘~고 말했다’ 風文 2022.10.11 615
3284 인과와 편향, 같잖다 風文 2022.10.10 582
3283 언어공동체, 피장파장 風文 2022.10.09 451
3282 풀어쓰기, 오촌 아재 風文 2022.10.08 612
3281 댕댕이, 코로나는 여성? 風文 2022.10.07 582
3280 위드 코로나(2), '-다’와 책임성 風文 2022.10.06 496
3279 위드 코로나, 아이에이이에이 風文 2022.10.05 142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