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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살해

최신판 사전도 요동치는 말을 다 붙잡지 못한다. ‘살해’는 ‘사람’을 죽일 때 쓰는 말인데, 이제는 동물에게도 쓴다. ‘엽기적인 고양이 연쇄 살해’, ‘길 잃은 강아지 잔혹 살해’. 동물의 인간화다. 동물에 대한 태도 변화는 말에도 흔적을 남긴다. ‘개 주인, 고양이 주인’이란 말은 자리를 잃고 ‘엄마, 아빠’와 ‘아이’라는 직계존비속 관계로 바뀌었다. 나는 ‘개 아빠’이고 직업은 ‘집사’이다.

고양이 관련 말은 특히 다채롭다. 행동(‘하악질, 골골송, 꾹꾹이, 식빵, 냥모나이트’), 생김새(‘양말, 젤리, 짜장, 카레, 고등어, 젖소’), 배변(‘감자, 맛동산’), 성장과정(‘꼬물이, 아깽이, 캣초딩’) 등 그들과 밀착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 단어들이 많다. 묘생(인생), 묘연(인연), 묘춘기(사춘기), 미묘(미모), 개묘차(개인차) 같은 말도 경쾌하다.

그사이 반려동물의 세계는 ‘펫코노미’라는 이름의 독립 시장으로 성장했다. 시장은 새로운 말의 자궁이다. 시장은 음식, 영양제, 장난감, 의류, 교육, 보험, 병원, 장례 등 ‘요람에서 무덤까지’ 의식주, 생로병사의 모든 단계에 촘촘히 대응한다. 동물 유기와 함께 걸핏하면 살처분당하는 가축 등 차별과 배제의 영역이 엄존하는 것도 인간세계와 거울처럼 닮았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자신들보다 애완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부르주아에게 반격을 가하려고 ‘고양이 대학살’ 사건을 일으킨 게 18세기였다. 이제 고양이는 장난감에서 인간의 친구로 바뀌었다. 고양이의 죽음을 ‘살해’라고 말하는 우리는 생명 존중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가?



최순실의 옥중수기

오백만 원. 후배는 성공한 사업가를 몇 번 인터뷰하고 나서 자서전 한 권을 ‘납품하는’ 대필 알바를 했다. 듬성듬성 빈 곳은 공허하고 상투적인 말들로 채웠다. 자기 일을 쓸 때도 미화와 과장을 일삼는데, 하물며 거액의 알바를 시켜 만든 자서전이니 어련했겠는가.

소설가 이청준의 <자서전들 쓰십시다>를 보면, 거짓 자서전은 잊고 싶은 과거 위에 새로운 이력서를 만들어 도배를 해버림으로써 주인공을 영원한 자기기만 상태에 빠뜨린다고 한다. 이러면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마저도 기만하게 된다. 과거 시제로 썼지만 미래에 대한 자기 암시도 하게 되어 평생 허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회의가 없는 자서전은 더 무섭다. 굳건한 신념 하나가 온 생을 관통하여 어떠한 자기모순도 없는 사람의 자서전이야말로 ‘말로 세운 동상’일 뿐이다.

전두환은 회고록을, 최순실은 옥중수기를 썼다지만 모두 실패한 자서전이다. 자서전은 주장이 아니라 고백이다. 스스로를 해명하려는 노력이다. 변명 비슷한 뜻으로 읽혀서 그렇지, ‘해명’은 자기 삶의 수치스러움과 비논리성을 풀어서 밝히는 일이다.

삶을 미화할 위험이 있는데도 자서전을 쓰는 이유는 자기 삶의 진실을 증언해 줄 게 딱히 없어서이다. 글은 어두운 과거를 분칠할 수도 있지만, 과거에 진실의 빛을 던질 수도 있다. 글은 좌절과 번민, 부끄러움과 헛헛함으로 처진 등짝을 곧추세워 줄 지지대이다. 공허한 말로 나를 포장할지, 진솔한 말로 나를 고백할지는 당신 몫. 말의 기만성과 말의 진실성을 넘나들 수 있는 기회. 부끄러움을 마주할 용기. 우리 자서전을 쓰십시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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