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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어 쓰기, 그 후

상대의 이름을 부르고, 반말만 쓰기. 학생들이 ‘진해, 안녕!’이라 한 지 석달이 지났다. 어찌 됐을지 궁금할 듯.

말끝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학생들은 ‘내 언어체계에 분열이 왔다.’고 고백한다. 분열이라니, 야호! 한가닥이던 말의 체계는 꽈배기처럼 순식간에 두가닥으로 갈라지고 뒤엉켰다. 부모 아닌 연장자에게 반말해본 적 없던 학생은 ‘이메일을 반말로 보내는 게 맞는지 수십번 고민’했다. ‘‘안녕하세요’에서 ‘안녕’으로 바뀌었으니 손까지 흔들어도 되는지, 꾸벅 허리를 숙여야 하는지, 아니면 허리를 숙이면서 동시에 손을 흔들어야 할지 헷갈렸다.’ 반갑구나, 번민하는 인간이여.

학생들에게 존댓말은 ‘안전장치’였다. 학생들끼리도 존댓말을 썼다. 상대에 대한 존중보다는 ‘심리적 거리두기’의 방편이랄까. 가까이 오지 마. 적당히, 거기까지.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비즈니스적’이다. 수업을 하고 수업을 듣는 것, 이 목적을 달성하면 끝’이라던 학생들은 평어를 쓰자 의자를 당기며 서로에게 다가갔다. 기꺼이 즐겁게 규칙을 바꿔 버렸다. 민달팽이처럼 안전장치를 걷어내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타인을 대했다. ‘위아래’ 분간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말도 많아지고 문자와 이메일도 늘고 웃음도 잦아졌다(강의실에서 웃다니!). 책 읽고 토론하는 시간은 도떼기시장처럼 시끌벅적. 학생들에게 저리도 할 말이 많았구나. 어느 날 문자 하나를 받았다. ‘진해, 내일 졸업연주회가 있어. 초대하고 싶어 연락했어! 이런 초대는 처음 해봐.’

더 나가보려고 한다. 한뼘씩, 야금야금.



위협하는 기록

총을 내려놓는다고 저절로 평화가 오지 않는다. 회초리를 내려놓는다고 인권이 넘치고 행복한 학교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수업 방해, 비아냥과 모욕, 동영상 촬영과 유포가 난무했다. 학생은 선생을 욕하고 놀릴 수 있지만, 선생이 그러면 아동학대다. 학생이 무슨 짓을 해도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교사들은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고 하소연한다(얼마 전 국회 교육위원회에서는 교장에게만 주던 생활지도권을 교사에게도 부여하는 법안을 의결했다).

11월30일 교육부 주최로 ‘학교 교육활동 보호 강화 방안 마련을 위한 공청회’가 열렸다. 교육부 시안에는 중대한 교권 침해를 범한 학생은 학교생활기록부(생기부)에 기록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기왕에 학교폭력도 기록하고 있으니, 교원에 대한 학생의 폭력도 기재하는 게 ‘형평성’에 맞다는 논리다. 예방적 차원에서 학생들에게 ‘경각심’을 줄 것이라 기대하는 눈치다.

‘떠든 사람’을 칠판 귀퉁이에 적는 건 ‘조용히 하라’는 일말의 계몽적 역할이라도 했다. 학교 문턱을 넘어가지도 않았다. 생기부에 ‘교사 폭행으로 전학 조치했음’이라고 적는 건 다르다. 교사에게도 ‘한번 당해봐라. 넌 이제 끝이야’라는 응징의 마음을 심어준다. 생기부는 이미 학생 지도보다는 대입 지원을 위한 서류다. 거기에 교권 침해를 기록하는 건 학생을 위협하는 일이자, 고등학교가 대입 준비 말고는 다른 역할을 할 마음이 없다는 걸 선언하는 것이다. 교사의 손에 만사형통의 무기가 주어지겠지만, 학교는 더욱 차갑고 황폐화할 것이다. 위협하는 기록으로 배움의 공동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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