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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아빠들

남성과 여성은 서로 평등해야 한다는 생각이 근대 초기부터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지만 아직도 사회 구석구석에 그 뜻을 구현해내지 못한 그늘진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 그동안 여성의 경제활동은 상대적으로 큰 진전을 이루어 직업 세계에서의 성적인 분업은 많이 극복이 된 셈이다. 그러나 아직도 출산과 육아 영역에서는 여성들 혼자서 짊어진 짐의 크기가 태산 같기만 하다.

국어사전을 들춰보면 ‘미혼모’라는 단어가 있다. 1960년대의 국어사전에는 없던 말이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전에 올랐다. 신문에는 1970년대 초에 등장했다. ‘미혼모’는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아기 엄마’라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임신과 출산 모두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엄청난 뜻이 담겨 있다. 즉 엄마와 아기가 모두 정당성이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 불법적인 임신과 출산을 불러온 공동책임자인 아빠를 가리키는 단어는 국어사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사전에 그러한 단어가 없다는 것은 사전 편찬자들의 실수가 아니다. 사전 편찬자는 아무도 쓰지 않는 단어는 사전에 절대로 싣지 않는다. 우리 모두 그런 단어를 만들어내지도 않았던 것은 남성의 신원을 철저하게 감추어 주는 일에 사실상 동참했기 때문이다. 곧 ‘미혼모’라는 단어가 나타난 이후 지금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우리 모두 사라진 아빠들을 전혀 ‘호출’한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법률과 어긋난 관계’의 책임은 오로지 미혼모들에게 돌아갔다.

혼자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하는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사무치게 서러웠을까? 게다가 태어난 아이는 아무 잘못도 없이 삶의 첫 시작부터 삐거덕거리기 쉬웠을 것이다. 이젠 공동책임자인 아빠를 찾아야 한다. 그들을 찾으려면 호출할 수 있는 단어가 필요하다. 그 단어로 법조문을 만들고, 구체적인 아빠로서의 공동책임을 묻고, 자신의 도덕적 의무를 다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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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빛 선동

‘피’라는 짧은 말 한마디는 참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의학적으로는 ‘순환계를 도는 붉은 액체’를 뜻하지만, ‘나의 핏줄’이라고 하면 혈연관계를 나타내며, “피를 토하다”, “피눈물을 흘리다”와 같은 구절이나 ‘피비린내, 피투성이’ 같은 말들은 고통이나 처참함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한자말로도 ‘혈관, 혈압’ 등의 의학 용어가 있고, ‘혈육, 혈통’ 같은 친족 용어도 있다. 또 ‘혈투, 유혈낭자’ 같은 호전적 표현, 그리고 ‘혈기, 혈색’과 같이 기운이나 활기를 보여주는 말도 있다. 의학 용어를 제외하면 무척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이러한 의미 기능이 바람직하게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혈세’라는 말은 조어법으로는 마치 ‘피에 붙이는 세금’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피 같은 돈’을 세금으로 냈으니 ‘피처럼 아까운 세금’이라는 뜻이다. 맥락 속에서 아껴 쓰고 조심해야 할 돈이라는 윤리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냥 세금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결국 혈세라는 말은 세금이라는 말을 감성화시킨다. 그래서 주로 상대 정파의 예산 집행을 공격하는 흥분제로 쓰인다. 그러나 세금은 감성적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매우 냉정하고 실리적으로 논의해야 할 대상이다. 혈세라는 말은 냉정한 계산을 해야 할 쟁점을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자칫 간단한 선동에도 넘어가기 쉽다.

비슷한 경우에 ‘혈맹’이라는 말이 있다. 원래는 맹세를 하면서 피를 찍어 바르는 것을 뜻했지만 지금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굳은 동맹’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수사법이다. 그러나 역사를 되돌아보면 대개의 동맹은 깨어졌다. 마치 동맹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기만 하다. 그러한 동맹에 핏빛을 물들여 가며 감성적인 선동의 단어를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보통 동맹이라고 말하며 서로의 이익이 언제까지 유효한지를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더 필요하지 않겠는가.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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