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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는 국가

설날 아침 지인이 문자를 보내왔다. 성전환 군인의 기자회견을 보고 용기를 내어 자신도 커밍아웃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자유와 행복을 놓치지 않겠으니 당신들도 응원해 달라고 한다. 양가에도 얘기했고 조만간 이혼도 하겠다고 고백했다.

고백은 숨겨둔 마음의 목소리를 밖으로 드러내는 일이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힘이 다른 어떤 위력보다도 세고 간절할 때 감행한다. 말의 진실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과거를 말하는 듯하지만 현재와 미래가 모두 연루되는지라 시간을 초월한다. 그래서 고백은 성스럽다.

문득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우울증을 심하게 앓고 있다고, 아버지의 가정폭력으로 자기 집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신내림을 받았다고, 어릴 때 부모가 이혼해 엄마랑 살고 있다고 ‘씩씩하게’ 고백하던 학생들 모습이 겹쳤다. 다행히 나는 국가가 아닌지라, 그들의 말에 별다른 가치 판단이나 지침을 내릴 자격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밥 한 그릇 술 한잔 같이하는 게 전부다.

그 고백이 국가를 향할 때가 있다. 비난과 낙인의 위험을 감내하고 최대의 용기를 내어 국가에 말을 거는 개인이 늘고 있다. 변희수 하사의 고백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는 역시나 비루했다. ‘불허, 나가!’라고 매몰차게 쏘아붙였지만, ‘전례’를 찾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국가는 과거에 매달렸다. 법과 규정이 아닌 진실의 힘으로 말하지 못했다. 국가는 이번 ‘첫’ 사례 앞에서 군인(사람)의 의미를 확장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고백하는 국가는 고백하는 개인들의 눈물 없이는 불가능한 꿈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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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의 순서

‘냉면’이 먹고 싶을 때 ‘냉면 먹자’고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살이 쉽지 않아 그 말 꺼내기가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뭐 먹을래?’라고 하면 메뉴 결정을 상대방에게 모두 맡기는 거라 마뜩하지 않다. 타협책으로 두 개 정도의 후보를 말하되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슬쩍 집어넣는다. 이럴 때 내가 원하는 음식을 먼저 말하는 게 나을까 나중에 말하는 게 나을까?

말실수도 그렇지만, 말하기의 순서에서도 무의식이 드러난다. 심리학에서는 맨 먼저 들은 말을 더 오래 기억한다는 의견(초두 효과)과 제일 늦게 들은 말을 더 오래 기억한다는 의견(최신 효과)이 팽팽하게 갈린다. 면접이나 발표를 할 때도 맨 먼저 하는 게 유리한지 마지막에 하는 게 유리한지 사람마다 판단이 다르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겠지만, 나는 아직도 아이 같아서 내 욕심을 앞세우더라. 지인과 저녁 약속을 하면서 “족발 먹을래 매운탕 먹을래?” 했다. ‘다행히’ 눈치 빠른 그는 족발을 택해 주었다. 사람에 대한 평가도 순서에 따라 달라진다. ‘정의롭고 쾌활하지만 뒷말하기 좋아하고 고집스러운 사람’과 ‘고집스럽고 뒷말하기 좋아하지만 쾌활하고 정의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 같다.

우리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말의 순서까지도 골몰한다. 먼저 말하기, 나중 말하기, 중간에 끼워 말하기를 적절히 택한다. 듣는 사람도 능동적이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대로 읽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일하는 직원이 “배가 고프지만, 참을 수 있어요”라고 말할 때, 당신은 밥을 살 건가 계속 일을 시킬 건가?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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