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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경계를 넘다

세상은 ‘아사리판’. 한 번도 ‘주인공’으로 살아본 적 없는 ‘건달’은 하는 일 없이 주변에서 ‘걸식’을 하며 살았다. 어느 날 ‘성당’처럼 지은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창에 얼굴을 붙이고 안을 기웃거렸다. ‘육안’으로도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장로’를 중심으로 ‘신도’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 ‘탐욕’과 ‘아집’이 어떻게 ‘세계’를 ‘타락’의 ‘나락’에 빠뜨리는지를 다루고 있었다.

현관문을 두드렸다. ‘집사’가 문을 열었다. 그는 다짜고짜 ‘곡차’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집사는 ‘난처’해하면서 교회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배고픈 ‘내색’은 하지 않고 ‘무심히’ 뒤를 따랐다. 집사가 말했다.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립시다. ‘지옥’의 길에서 빠져나와 ‘천당’에서 ‘천사’와 함께 살듯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지나간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집착’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오로지 ‘현재’ 일어난 것들을 ‘관찰’해야 합니다.” 건달 왈, “나는 기독교 ‘교리’에 ‘문외한’이지만 ‘선생’의 ‘설교’는 마치 불교 말씀 같구려.” 집사는 웃으며 “모든 건 변하니까요”.

건달은 ‘회심’하여 그 집사를 ‘선생’으로 삼아 ‘제자’가 되었다. 그 후로 ‘차별’ 없는 ‘공생’ 사회라는 ‘제목’으로 학위를 따고 ‘교수’가 되어 ‘성자’처럼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았다.(*작은따옴표 안의 낱말은 모두 불교와 관련된 일상어이다. 불교용어도 산스크리트어의 음역이거나 의역이 많다. 말은 경계를 넘는다.)



동서남북

도대체 ‘오른쪽’은 어디인가? 쉬운 말을 뜻풀이하기가 더 까다롭다. 사전에는 ‘북쪽을 향했을 때 동쪽과 같은 쪽’이라는 뾰족수를 내놓고 있지만, 보통은 우리 자신의 몸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눈이 향하는 곳을 기준으로 가로세로로 나누어 오른쪽, 왼쪽, 앞, 뒤를 가리킨다. 자기를 중심으로 방향을 파악하기 때문에 몸의 방향에 따라 전후좌우가 수시로 바뀐다. 지도나 나침반 없이, 별다른 방향감각 없이도 공간을 지각하니 편리하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구구이미티르족에게는 ‘앞, 뒤, 오른쪽, 왼쪽’ 같은 말이 없다. 동서남북을 가리키는 말만 쓴다. 몸과 무관한 절대적 방향감각! 오른쪽 뺨에 묻은 밥풀을 보고 ‘뺨 서쪽에 밥풀 묻어 있어’라 하고, 발 옆으로 개미가 지나가면 당신 북쪽으로 개미가 지나간다고 한다. 내비게이션 지도를 정북 방향 모드로 설정하면 이 감각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지도를 북쪽으로 고정시켜 놓아 주행 방향과 다르게 옆이나 거꾸로 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들은 허허벌판에서도 목표지를 쉽게 찾아가는데, 이러려면 어떤 상황에서도 정확한 방위를 알아야 한다. 낮이든 밤이든 실내든 실외든 심지어 동굴 안에서도 마음속 나침반을 작동시켜야 한다. 놀랍게도 두 살 때부터 익히기 시작해 일곱 살이면 통달한다.

아버지 세대만 해도 해가 어디서 떠서 어디로 지는지 알고, 남향이니 북향이니 하며 방향에 대한 감각을 풍수지리적으로나마 익혀 왔다. 이제 우리는 땅에서 더욱 멀어졌다. 그걸 알 수 있는 질문. 당신은 지금 당장 해가 어디에서 뜨는지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는가?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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