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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07 22:59

편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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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한 마음으로

 어느 기관의 직원 모집에 무려 4500여명이 응시했다. 마침 어느 고위층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사람을 위해 전화로 부탁을 해주었는데, 1차 서류 전형에서 겨우 2299등을 한 그 인턴이 무리한 성적 조작의 반칙을 통해 최종 합격자 36명에 포함되었다. 그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합격되었던 응시자 셋이 떨어졌다고 한다.

 황당한 것은 이것을 수사한 검찰의 태도다. 전화로 ‘부탁’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류 조작을 시킨 것은 아니라는 이유로 부탁한 사람은 빼고 성적을 조작한 사람들만 기소하는 모양이다. 그 까닭을 검찰은 그 고위층이 ‘그저 편한 마음으로 부탁한 것’이라고 둘러대어 주었다.

 한쪽이 편한 마음으로 부탁했는데, 부탁받는 상대방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들어주어야 하는 사안으로 받아들였다면 이것은 정상적인 소통이 아니다. 갑과 을의 균형이 극단적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부탁’이라는 언어행위는 상대방에게 결정권이 있는 경우에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전혀 그러한 힘이 없는 약자이면서 강자에게 그러한 ‘부탁’을 받았다면 그것은 부탁조의 협박이거나 명령이다. 조폭들이 등장하는 영화에서 “요즘 바쁜가봐!”라는 말 한마디에 얼른 “죄송합니다. 곧 찾아뵙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디 정상적인 인사와 답례인가? 권력과 굴종의 대칭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상징 아닌가?

언어는 형식적 규정만 잘 맞는다고 제대로 된 말이 아니다. 열린 사회에서 누구나 동등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소통을 위한 언어가 된다. 공정해야 할 공직사회에서 이렇게 ‘암흑가의 대화’ 같은 표현이 횡행하며 젊은이들의 취업 활동을 방해한 것은 분명히 권력 남용이자 공중의 이익을 거스른 짓이다. 그리고 검찰은 말의 뜻을 교묘하게 틀어버림으로써 더 중요한 자신의 의무를 포기했다. 법이 언어를 지키지 못하면 언어도 법을 지키지 못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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