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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용모순

아무래도 인간은 복종보다는 삐딱한 쪽을 선택한 듯하다. 말에도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이 날카롭게 맞서는 형용모순이란 것이 있다. ‘네모난 동그라미’ 같은 표현이 그 예이다. 현실에 존재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당신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동그라미를 네모나게 누르거나 네모를 동그랗게 당기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표현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한다. 모종의 진실을 담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맞이하여 ‘침묵을 듣는 이’에게 강으로 오라고 청할 수 있다. ‘눈뜬장님’과 함께 ‘산송장’이 된 친구의 병문안을 갈 수도 있다. 형용모순은 생활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시마 육수’에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닭개장’에는 개고기가 없다. 어느 냉면집에선 ‘온냉면’을 끓여 판다. ‘아이스 핫초코’는 땀을 식혀준다.

종교에 쓰인 형용모순은 반성 없는 일상에 대한 각성의 장치다. 도를 도라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도가 아니다. 부처가 있으면 그냥 지나가고 부처가 없으면 더 냉큼 지나가라. 예수는 원래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비워 사람이 되었다. 가난하고 비통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이런 형용모순도 있다. 가령, ‘시민군’. ‘시민’이면서 ‘군인’. 비극적 결합이다. 총을 만져본 적도 없는 학생들도 있었다. 39년 전 오늘, 새벽 도청의 시민군은 계엄군에게 모두 사살, 체포되었다. 진압 후 계엄군은 능청스레 광장 분수대 물을 하늘 높이 솟구치도록 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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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의 퇴보

말 몇마디만 듣고도 그 사람 고향을 어림잡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게 꽤나 솔깃했던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발음으로 네 편 내 편 갈라 해코지를 한 사례들이 많다.

‘쉽볼렛 테스트’라는 유명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길르앗과 에브라임이라는 유다의 두 파벌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패전한 에브라임 사람들이 강을 건너 도망치는데, 길르앗 사람들이 길목을 막아서며 ‘쉽볼렛’이라는 단어를 말해보라고 시킨다. 제대로 못 하고 ‘십볼렛’이라고 하면 잡아서 죽였다. 그 수가 4만2천명이었다. ‘쌀’을 ‘살’이라 하면 죽이는 격이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말로 ‘15엔 50전’(주고엔 고주센)이란 말을 시켜 제대로 못 하면 조선인이라 하여 바로 살해했다. 발음이 생사를 갈랐다.

나는 가끔 태극기집회에 간다. 그곳엔 어떠한 머뭇거림도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추겼고, 확신에 찬 1만명은 마치 한 사람 같았다. 그 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다 빨갱이였다. 언어는 퇴보하고 있었다. 막힌 하수구처럼 다른 말은 흐르지 못했다. 고향을 알면 빨갱이인지 알 수 있단다. 소득주도성장 때문에 나라를 망친 대통령은 빨갱이다. 북한에 돈을 제일 많이 갖다 바친 전임 대통령은 빨갱이다. 노란 리본 달고 다니는 놈들은 빨갱이다. 그래서 다 죽여야 한다. 빨갱이면 왜 죽여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먼저 죄인이라 불러놓고 죄목을 찾는다.

비통함이 없는 분노는 얼마나 위험한가. 망설임이 없는 적개심은 얼마나 맹목적인가. 거기, 나의 아버지들이 단어 하나를 부여잡고 막무가내로 앉아 있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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