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02.10 10:31

받아쓰기 없기

조회 수 188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받아쓰기 없기

새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파격이라고 관심들이 많다. ‘파격’이란 오래된 격식이나 관행을 깨뜨리는 참신한 행동을 말하는 긍정적인 표현이다. 그중에 언어 문제에 대한 파격은 단연코 대통령의 발언을 받아쓰기하지 말고 의견을 말해 달라는 요구였다. 언어만이 아니라 기존의 태도, 생각, 가치 등을 전면적으로 혁신하려는 외침으로 해석된다.

남북한의 정치에 여러 가지 다른 점이 많고도 많지만 유일하게 똑같아 보이는 것이 상급자는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데 참모들은 부지런히 수첩에 받아쓰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누구 하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오로지 상명하달만을 목표로 삼고 있는 조직의 모습이었다. 어찌 이런 곳에서 창의적인 생각과 의견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잘되길 바라지만 적이 걱정되는 면은 이 결정이 대통령의 ‘지시’로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참모 가운데 누군가가 이런 문제 제기를 먼저 했더라면 더 강력한 혁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의 자료조차 없앤다는 말에는 이제 우리도 무의미한 형식을 떨어내고 제대로 의견을 모으는 회의에 충실할 수 있는 계기가 왔구나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이왕이면 언어 표현도 혁신의 길에 동반했으면 한다. 문장의 서술어들은 그 말의 사회적 기능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서술어에 ‘지시, 명령, 하달’과 같은 말이 들어가면 의사결정의 혁신 취지는 사라진다. ‘의견을 모았다’라든지, ‘어떤 의견으로 조정되었다’와 같은 표현이 더 바람직하다. ‘전격적으로, 즉각적으로’ 같은 사려 깊지 못한 부사어들도 삼갔으면 한다.

그래서 부디 소통하고, 의견을 나누고, 다양한 주장을 통합하는 성숙한 정치의 첫걸음이 이 기회에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말이 탁상공론의 도구에서 벗어나 삶을 변화시키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31814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78605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193296
3036 풋 / ‘열’(10) ①, ‘열’(10) ② 風文 2020.05.10 1580
3035 와이로 / 5678님 風文 2020.06.05 1584
3034 웨하스 / 염장 風文 2020.06.10 1592
3033 마마잃은중천공? / 비오토프 風文 2020.07.03 1652
3032 ‘○○○ 의원입니다’ / ‘영업시운전’ 風文 2020.06.22 1685
3031 황금시간 / 우리말 속 일본어 風文 2020.06.11 1688
3030 눈으로 말하기 / 언어와 민주주의 風文 2020.07.08 1699
3029 돔 / 식해 風文 2020.06.23 1708
3028 멀쩡하다 / 내외빈 風文 2020.06.18 1722
3027 문어발 / 징크스 風文 2020.07.02 1775
3026 오징어 1 / 오징어 2 風文 2020.07.01 1793
3025 방언 분투기 / 국민 정서 風文 2020.07.12 1801
3024 ‘엘씨디로’ / 각출-갹출 風文 2020.05.06 1818
3023 퇴화되는 표현들 / 존댓말과 갑질 風文 2020.07.07 1825
3022 鬱陶項(울돌목) / 공짜 언어 風文 2020.07.05 1861
3021 '사과'의 참뜻 / 사람의 짓 風文 2020.07.14 1862
3020 찜갈비-갈비찜 / 영란은행 風文 2020.06.07 1864
3019 배제의 용어, '학번' / '둠벙'과 생태계 風文 2020.07.10 1877
» 받아쓰기 없기 風文 2022.02.10 1882
3017 포퓰리즘 / 특칭화의 문제 風文 2020.07.15 1906
3016 삼인칭 대명사 / '동양'과 '서양' 風文 2020.07.06 1913
3015 건강한 가족 / 국경일 한글날 風文 2020.07.18 197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