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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하다

양말 속 발가락처럼 낱말도 꼼지락거린다. 가만히 있는 듯하지만 스멀스멀 다른 뜻으로 옮아간다. ‘납작하다’는 ‘납작한 돌’, ‘납작한 코’처럼 생김새가 평평하고 얇은 상태를 뜻했다. 비유적으로 쓰여 잘난 체하는 사람의 콧대를 납작하게 꺾어줘야 직성이 풀리기도 하지만, 일보전진을 위한 무한후퇴의 자세로 오늘도 납작 엎드려 산다.

요즘엔 다양하고 입체적인 대상이나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이해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노인’이라는 말 한마디가 내 인생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코로나는 우리 생활을 납작하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한마디 말로 특정 부류에 포함시키면, 당사자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이야기가 지워진다. 복잡하고 입체적인 현상을 한두 가지 원인이나 갈래로 단순화하는 것도 ‘납작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세대론은 세대 내부의 관계를 납작하게 만든다’, ‘불평등 담론은 너무나 빈약하고 납작하다’, ‘인구 문제를 저출생 문제로만 접근하면 논의를 납작하게 만든다’. 복잡한 문제를 ‘말의 압착기’로 내리눌러 마치 쉽고 간단한 문제로 뒤바꾸면 해결될까. 아니, 그냥 ‘압사’할 뿐.

‘납작하다’는 단순화에 대한 예민한 반발심이자 그런 평면적인 이해 방식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이다. 매사를 한두 가지 원인으로 되돌리는 환원주의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장애인을, 여성을, 노인을, 노동자를, 아니 모든 생명을 납작하게 만들지 말라. 우리의 문제는 다차원적이다. 이 말의 반대편에는 ‘고유성, 입체성, 복합성, 두툼해지기, 부풀어 오르기’ 같은 말이 자리 잡고 있다. 즉, 사람.


국가 사전을 다시?

국립국어원이 70억원을 들여 <표준국어대사전>을 전면 개편하겠다고 한다. ‘<표준국어대사전>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못 하게 되었으니, 국가사전 발행(1999년) 20여년 만에 우리는 언어국가주의에 완전히 포박되었다. 2년 전 호기롭게 ‘국가 사전 폐기론’을 주창한 입장에서 의견을 내지 않을 수 없으나 씨알도 안 먹히는 듯하니 딴 얘기로 에둘러 가볼란다.

사람들은 왜 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그토록 반대했던가. 국정교과서에도 장점이 분명히 있다. 나라에서 펴내니 교과서의 질이 보장되고 일관성도 있겠지. 모든 학생이 같은 책으로 배우니 시험 준비도 편할 테고. ‘균형 잡힌 올바른 교과서’(박근혜)를 내면 세상은 ‘국론 통합’의 태평성대가 오리라.

하지만 교육계는 국정화에서 빠져나와 검정제와 인정제로 내달리더니, 이젠 자유발행제까지 고민한다.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절반이 자유발행제를 채택하고 있다. 교과서 발행과 채택에 국가의 간섭과 통제가 없다는 뜻. 학교는 대혼란에 빠졌을까? 교과서에 대한 책임이 정부에서 교사나 학교운영위 등 시민사회로 옮아가 자율성과 다양성, 책임성이 높아질 뿐.

교과서도 이러한데, 하물며 꿈틀거리고 잡히지 않는 말을 모아 정리하는 걸 국가가 또 한다고? 서점 검색창에서 ‘(한)국어사전’을 쳐보라. 초등학생용이나 한국어학습자용 빼고 국어사전이 몇 종류나 살아 있는지. 가뭄철 물웅덩이에서 올챙이 몇 마리 보는 듯할 것이다(비교 삼아 아마존에서 일본의 ‘国語辞典’을 검색해보길). 그러니 더더욱 국가에서라도 내야 한다고? 하아….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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