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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바깥

1일 3교대 노동자는 ‘갑반, 을반, 병반’ 중 하나에 속해 일한다. 갑을은 일하는 순서다. 60갑자에서도 갑을은 시간의 순서이다. 하지만 순서는 쉽게 우열로 바뀐다. 야구에서나 점수 내기 쉬운 3루가 1루보다 낫지만, 그 외에는 1등, 1등석, 1등급이 더 좋다. ‘갑’은 먼저 들어가고 좋은 자리에 앉고 목소리가 높으며 호탕하게 웃는다. ‘갑을관계’나 ‘갑질’이란 말은 서열과 위계를 뜻하는 사회학 용어가 되었다.

이럴 때 말을 바꾸려는 시도를 한다. 예전에 아파트 주민들과 경비원들이 자신들은 대등한 관계라면서 근로계약서를 ‘동행 계약서’로 바꿨다. ‘동행 조례’나 ‘갑을 명칭 지양 조례’를 제정한 지역도 있다. 헌법 개정안에는 ‘근로’를 ‘노동’으로 수정하여 노동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근로자, 근로기준법, 근로계약서, 공공근로’를 ‘노동자, 노동기준법, 노동계약서, 공공노동’으로 바꿔 부르면 그런 느낌이 든다.

말을 바꿀 때 말의 바깥을 생각하게 된다. 이름과 실상이 서로 맞아야 한다. 근로가 노동이 되고 갑을이 동행이 되어도 현실이 여전히 노동을 배반한다면 실망스럽다. 정치를 한다면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한 공자의 발언은 그저 말을 잘 다듬겠다는 뜻이 아니다. 이름에 걸맞게 현실을 바로잡겠다는 실천의지의 표명이다. ‘정규직 안 돼도 좋으니 더 죽지만 않게 해 달라’는 노동자들 앞에서 ‘갑을’을 ‘동행’으로 바꾸자는 ‘말’은 얼마나 한가한가.

말에 민감할수록 말의 바깥을 봐야 한다. 짓궂게 묻는다면, ‘굴종적인 동행관계’보다 ‘대등한 갑을관계’가 낫다.



말의 아나키즘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에 가면 ‘밝은누리’라는 대안학교 겸 공동체가 있다. 학교와 집을 손수 짓고 적정기술과 농사를 익히며 삶과 배움의 일치를 추구한다. 그들의 ‘말글살이’는 자못 의연하여 생활 용어를 힘껏 바꿔 쓴다. ‘하늘땅살이(농사)’, ‘몸살림(수신)’, ‘고운울림(예술)’이라든가, ‘어울쉼터, 아름드리(생활관)’ 같은 말을 만들었다. 일주일을 ‘달날, 불날, 물날, 나무날, 쇠날, 흙날, 해날’로 부른다. 코로나19는 ‘코로나 돌림병’이다.

삶의 방식이 다르면 말본새도 달라진다. 이들에게 말은 도구가 아니다. 새로운 말의 발명은 인식과 태도의 변화를 이끈다. 삶의 자리에 말을 초대하고, 초대받은 말은 다시 삶을 정돈한다. 고유어로 바꾸려는 강박이 보이지만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방문객은 ‘쇠날’로 듣고 ‘금요일’이라 ‘번역’한다. 낯설지만 과잉되지 않다. 그들은 삶의 변혁을 추구하지 언어운동을 하지는 않는다.

이들을 보며 말의 아나키즘을 상상한다. 아나키즘을 ‘모든 지배의 거부’, ‘제도가 아닌 자발성에 의한 연대’라고 당돌하게 요약해 놓고 보면, 우리 사회는 말의 아나키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한국 사회는 말의 무질서나 오염을 걱정하고, 올바른 말을 병적으로 강요해 왔다. 질서는 인위이고 위계이자 명령이다. 엘리트주의고 전체주의적이다. 그래서 표준어를 참조하지 않는 자유의 영토, 작은 공동체의 자율적 합의로 만드는 언어가 여기저기 꽃피어야 한다.

이게 어찌 그곳 사람들만의 문제겠는가. 말을 법 아래가 아닌 삶의 곁에 서게 할 때 우리는 자유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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