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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

“뜬구름 잡는 얘기 그만해라.” 자주 듣는 말이다. ‘말은 본질이 없고 시시때때로 변하며 다른 말과의 우연한 조응과 부딪침만이 변화의 동력’이라고 했으니 그럴 수밖에.

의미가 고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오해다. 낱말마다 번호를 매겨 뜻풀이를 해 놓은 사전의 영향이 크다. 사전은 우리 머릿속도 낱말과 의미가 순서대로 쌓여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의미는 말들 사이, 그리고 말과 세상 사이에서 벌어지는 의존적인 상호 발생 현상이다.

‘큰일’의 뜻이 뭔가? 어떤 뜻 하나가 떠올랐다면, 실은 이 낱말만의 뜻이 아니다. 다른 낱말과의 연루!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면, ‘큰일을 하다, 큰일을 맡다’ 같은 표현에서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큰 사고나 안 좋은 일’이란 뜻이라면, ‘큰일이 나다, 큰일을 저지르다’에서 갖고 온 것이다. ‘결혼이나 장례 같은 행사’라면, ‘큰일을 치르다’에서 온 것일 테고.

그렇다면 ‘큰일’의 의미는 어디에서 왔는가. 뒤에 붙는 ‘하다, 나다’ 따위의 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하다’는 ‘중요한 일’, ‘나다’는 ‘안 좋은 일’이랑 결합해야만 할 이유도 없다. 도둑질한 사람에게 ‘큰일을 했다’거나, 더운 날 시원한 소나기를 보고 ‘큰일이 났다’고 하지 못할 법은 없다. 그러니 ‘큰일을 하다, 큰일이 나다’에 쓰인 긍정·부정의 의미는 이 표현 속에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어떤 일이 ‘큰일’인지에 대한 판단에는 사회적 습속이나 통념, 개인의 경험과 가치체계가 작동한다. ‘대통령’은 큰일인가? ‘청소 노동’은 작은 일인가? 말은 말을 초과한다.


역겨움에 대하여

‘겹다’의 옛말은 ‘계우다’ 또는 ‘계오다’이다. ‘이기지 못하다’라는 뜻인데, 목적어를 요구하는 동사였다. ‘바람이 하늘 계우니’는 ‘바람이 하늘을 이기지 못하니’, ‘마음을 계와’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정도로 해석된다.

반면에 ‘겹다’는 형용사인데, ‘덥다, 좋다’처럼 뜻이 선명하지 못하여 ‘복에 겹다, 흥에 겹다’처럼 다른 말을 취하고 나서야 뜻이 잡힌다. ‘겹다’가 들어간 말은 어떤 기준을 초과하거나 견디기 어려운 상태를 뜻하는데, 낯가림이 심해 그리 많지도 않다. ‘눈물겹다, 역겹다, 정겹다, 흥겹다, 힘겹다.’ 이들 말은 모두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의 주관적 감정을 드러낸다.

‘역하다’만으로도 구역질이 나고 메스꺼운 느낌인데, ‘역겹다’는 거기에 ‘겹다’까지 겹쳐 부정적인 느낌이 극대화된다. 역겨운 생선 비린내나 시궁창 냄새를 맡으면 토할 것처럼 헛구역질이 나온다. ‘역겨움’은 의지적이지 않다. 냄새를 맡자마자 자동적으로 나오는 몸의 반응이다.

이 말을 사람에게 쓰면 그 순간 상대는 상종 못 할 인간, 악마적 인간, 위선적 인간, 냄새나는 인간이 된다. 대화는커녕 길에서 마주치기도 싫다. 역겨움의 감정은 이성이 마비되고 판단이 중지된 상태이다. 나도 이런 감정에 자주 빠진다. 복잡한 세상을 선악의 구도로 보게 만드는데, 개미지옥에 빠진 듯 여기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망가뜨린다. 당신에게 역겨운 존재는 누구인가? 그게 개인이어도 문제지만, 특정 집단을 향할 때는 더욱 문제다. 그게 쌓이면 혐오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된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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