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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법을 없애자 (3)

가짜 소설 <쭈꾸미>의 한 대목. “오랫동안 투정을 부려 ‘짜장면’이 표준어가 되었다. 우리 ‘쭈꾸미’도 표준어로 인정받기 위해 상소문을 올리자!”(‘쭈꾸미’는 비표준어).

정상적인 국가라면 정해진 원칙을 유지하고 적용하려고 한다. 만 18살에서 하루라도 모자라면 투표를 할 수 없다. 이게 국가 행정의 특징이다. 일관성! 이 원칙을 말에도 적용해왔다. 하지만 원칙의 뒷배가 든든하지 않다. ‘예컨대’가 맞나, ‘예컨데’가 맞나? ‘예컨대’가 맞다. 이유는? 옛날부터 그렇게 썼으니까.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서도’에 쓰인 ‘-지만서도’도 비표준어다. 이유는? 자주 안 쓰여서. ‘널판자, 널판때기, 널빤지’는? 모두 표준어. 다 자주 쓰여서. ‘겨땀’은 비표준어다. ‘곁땀’이 표준어다. 이게 표준어니까!

맞춤법을 없애자는 주장은 결국 ‘표준어’를 없애자는 것이다. 표준어를 정하는 주체를 국가에서 시민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표준어에 대해 말들이 많으니 국가는 ‘복수 표준어’라는 묘안을 제시했다. 그 결과, 해방 이후 최고 희소식인 ‘짜장면’의 표준어 등극. 2011년 일이다. 10년 동안 5회에 걸쳐 74개가 표준어로 바뀌었다. 말은 날아다니는데 국가는 느리다. 심의회 횟수를 늘리고, 복수 표준어를 확대한다고 해결할 수 없다.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게 답이다.

말에는 저절로 질서가 생기고 관습이 만들어지고 하나로 정착하는 기질이 있다. 사람처럼 각각의 여정과 우여곡절이 있다. 말이 모이는 곳은 한 사회의 꽃인 사전이다. 언제까지 ‘쭈꾸미’들처럼 왕의 교지를 기다릴 텐가.



나만 빼고

‘거짓말쟁이의 역설’은 논리학의 오랜 주제다. 참이라고도, 거짓이라고도 할 수 없는 발언.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출신인 내가 ‘강원도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래요’라 한다면, 이 말은 참말일까, 거짓말일까? 참말이라면 강원도 출신인 나도 거짓말쟁이이므로 이 말도 거짓말이 된다. 거짓말이라면 나는 참말만 하는 강원도 사람이 되므로 이 말은 참말이 된다. 헷갈린다고? 해맑도다, 그대의 두뇌.

자기 머리를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의 머리만 깎아 주는 이발사가 있다. 그는 자기 머리를 깎을까, 못 깎을까? 자기 머리를 깎는다면, ‘머리를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만 깎아야 하는데 스스로 머리를 깎았으므로 깎으면 안 된다. 머리를 깎지 않는다면, 자기 머리를 스스로 깎지 않는 사람에 속하므로 머리를 깎아 주어야 한다. 장군이 ‘내 명령에 따르지 말라’고 명령하면, 따를까, 말까? 모르겠다고? 복되도다. 그대의 투명한 두뇌.

말장난으로 보이겠지만, 많이들 쓴다. 어른은 아이에게 ‘딴 사람 말 듣지 마!’ 남자친구는 애인에게 ‘남자는 다 늑대니 조심해.’ 운전자는 화를 내며 ‘오늘 왜 이리 차가 밀려!’

‘나만 빼고’ 생각하면 가능하다. 말하는 이는 말에서 분리된다. 듣는 이도 말하는 이를 빼고 이해하므로 꼬투리를 잡지 않는다. ‘당신도 딴 사람이고, 당신도 남자고, 당신도 차를 몰고 나왔다’며 정색하지 않는다. 안전한 이율배반.

우리는 ‘나만 빼고’ 식 말하기에 익숙해서 분열증에 걸리지 않는다. 부조리에 분노하되 공범인 우리도 함께 생각하면 좋겠다, 나만 빼고.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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