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0.05.23 15:14

청마 / 고명딸

조회 수 149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청마

고독은 욕되지 않으다/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겨울의 숲으로 오니/ 그렇게 요조(窈窕)하던 빛깔도/ 설레이던 몸짓들도/ 깡그리 거두어간 기술사(奇術師)의 모자(帽子).// 앙상한 공허만이/ 먼 한천(寒天)의 끝까지 잇닿아 있어/ 차라리/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 들어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물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새해 이 자리를 시로 열었다. “그때 그 시가 뭐였지?” 미국에서 사업하는 오랜 벗이 건넨 한마디 때문이다. 학창 시절 펜으로 휘갈겨 써준, 가슴 뛰게 했던 시 한 수를 이제 와 새삼 이 시절에 떠올린 까닭은 캐묻지 않았다. 그저, 벗 앞에서 다시 읊게 된 것이 고마웠을 뿐. 시에 담긴 뜻 따위를 분석하는 짓은 주제넘은 일이니 시어 몇 개만 짚어보자. ‘요조하다’는 ‘여자의 행동이 얌전하고 정숙하다’, ‘기술사’는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부리는 사람’, ‘한천’은 ‘겨울의 차가운 하늘’을 뜻한다. ‘에이다’는 ‘에다’(칼 따위로 도려내듯 베다)의 피동사, ‘옥’은 곧 ‘감옥’, ‘연자’는 ‘연자매(소나 말이 돌리는 큰 맷돌) 위에 있는 굴대 모양의 맷돌’을 가리키고 ‘치레하다’는 ‘실속 이상으로 꾸미어 드러내다’이다.(표준국어대사전) 시가 발표된 때는 ‘3·15 부정선거’로 시끄럽던 1960년, 제목은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작가는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회자되는 ‘깃발’을 쓴 유치환, 그의 호는 청마(靑馬)이다.


………………………………………………………………………………………………………………
고명딸

새해 들어 선보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첩첩산중의 주인공을 찾아 연예인 몇이 자식 노릇을 한다는 설정이다. ‘신개념 리얼리티 관찰 프로그램’을 내세운 이 제작물의 출연자는 단출했다. 외딴곳에 사는 노부부와 자식뻘의 남자 넷, 여자 하나. 거기에 개 몇 마리가 양념처럼 등장했다. 첫 방송치고는 시청률이 나쁘지 않았던 이 프로그램에 고개 갸웃거리게 한 대목이 나왔다. ‘4남1녀의 외동딸을 소개한다’는 자막이다. ‘아들 많은 집의 외딸’은 ‘고명딸’이고 ‘외동딸’은 무남독녀를 이르는 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인해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외동딸’은 ‘외동아들’(외아들)처럼 ‘외딸’을 귀엽게 이르는 말이다. 사전은 ‘외딸’을 ‘다른 자식 없이 단 하나뿐인 딸’로 설명하면서 다음 뜻으로 ‘다른 여자 동기 없이 하나뿐인 딸(독녀)’로 풀이하고 있다. 아울러 뜻풀이 뒤에는 참고 어휘로 ‘고명딸’을 제시하고 있다. 사전의 두 번째 뜻풀이에 따르면 ‘4남1녀의 외동딸’이 틀린 표현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이 경우엔 ‘고명딸’이라 콕 찍어 표현하는 게 낫겠다. ‘고명딸’이라 하는 것이 뜻을 분명하게 할뿐더러, 이 말의 어원을 밝혀보면 ‘외동딸’보다 한결 살갑게 다가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고명딸’은 ‘고명+딸’로 분석된다. ‘고명’은 ‘모양과 빛깔을 돋보이게 하고 맛을 더하기 위해 음식 위에 얹거나 뿌리는 것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고명딸’은 음식을 만들 때 주재료 위에 예쁘게 장식하는 고명처럼 아들만 있는 집에 예쁘게 있는 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명딸’을 전남과 평안 지방에서 ‘양념딸’이라고 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고명딸’은 고명처럼 예쁜 딸이란 뜻이다.(21세기 세종계획 누리집) ‘고명’에 기대어 나온 ‘고명아들’이 없는 까닭은 그래서일 것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28582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75441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190206
3058 초생달 / 초승달, 으슥하다 / 이슥하다, 비로소 / 비로서 바람의종 2011.11.15 18627
3057 초미 바람의종 2007.08.30 8473
3056 초를 치다 바람의종 2010.09.05 13247
3055 쳇바퀴 탈출법(1~3) 風文 2022.10.01 1346
3054 체화 바람의종 2012.01.24 11321
3053 체제와 체계 바람의종 2010.09.01 12798
3052 체언의 쓰임새 바람의종 2010.01.09 9041
3051 체신머리, 채신머리 바람의종 2009.07.18 14085
3050 체로키 글자 바람의종 2007.12.31 5983
3049 청신호 바람의종 2007.08.30 7482
3048 청소년의 새말 바람의종 2007.10.17 10436
3047 청설모 바람의종 2009.08.07 8635
3046 청사진 바람의종 2007.08.24 7551
3045 청사 바람의종 2007.08.24 5754
» 청마 / 고명딸 風文 2020.05.23 1497
3043 첫째, 첫 번째 바람의종 2008.09.06 8990
3042 첫번째, 첫 번째 바람의종 2011.12.27 9523
3041 첩첩산중 바람의종 2008.10.26 10814
3040 철쭉 바람의종 2008.08.13 8586
3039 철장신세 바람의종 2011.11.21 10555
3038 철부지 바람의종 2007.05.23 7989
3037 천편일률 바람의종 2007.12.22 728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