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1.11.10 18:29

주어 없는 말

조회 수 68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주어 없는 말

주어가 없다는 말은 보통은 국어 선생님들이 해야 제격이다. 그러나 종종 정치권에서 주고받는 논쟁에는 주어가 없다는 둥 하면서 느닷없는 문법 논쟁이 일다가는 표연히 사라지곤 한다. 문법 상식으로는 당연히 모든 문장에는 주어가 있는 것이 옳게 느껴진다. 서술어는 있는데 그 움직임의 주체인 주어가 없다는 것은 세상의 순리가 아닌 듯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이 세상의 이치를 그림 그리듯이, 또 사진 찍듯이 드러내지는 않는다. 언어 자체가 인습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그 형식에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면서 숱한 언어적 법칙이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여 있어서 언어논리적인 규칙만으로는 설명이 쉽지 않은 부분도 생긴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비가 온다’고 하면서 ‘비’라는 주어를 내세우는데 영어에서는 의아하게도 ‘it’이라는 가주어를 쓰기도 한다.

또 우리가 말을 하다 보면 주어나 목적어를 내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주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도둑이야!” 아니면 “불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면 주어가 없는 탓에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할 사람은 없다. 어디냐고 되물으며 함께 뛰어가려 할 것이다.

언어를 해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문법만도 논리만도 아니다. 그것은 남의 마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감수성이다. 종종 외국에 가서 짧은 외국어로 실컷 여행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의 언어 능력 덕분이라기보다는 우리를 맞이하는 그 현지인들의 감수성 덕이 더 크다. 정치인들이 주어가 없다고 둘러댈 때마다 그들의 정치적 좌표를 감수성을 가지고 들여다보라. 그들이 왜 주어가 없다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지 더욱더 큰 문법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1. No Image notice by 바람의종 2006/09/16 by 바람의종
    Views 28768 

    ∥…………………………………………………………………… 목록

  2.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3. No Image notice by 風磬 2006/09/09 by 風磬
    Views 190354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4. No Image 12Jan
    by 風文
    2022/01/12 by 風文
    Views 735 

    자백과 고백

  5. No Image 12Jan
    by 風文
    2022/01/12 by 風文
    Views 795 

    오염된 소통

  6. No Image 11Jan
    by 風文
    2022/01/11 by 風文
    Views 936 

    공화 정신

  7. No Image 11Jan
    by 風文
    2022/01/11 by 風文
    Views 1131 

    띄어쓰기 특례

  8. No Image 09Jan
    by 風文
    2022/01/09 by 風文
    Views 602 

    올바른 명칭

  9. No Image 09Jan
    by 風文
    2022/01/09 by 風文
    Views 788 

    한자를 몰라도

  10. No Image 07Jan
    by 風文
    2022/01/07 by 風文
    Views 648 

    일고의 가치

  11. No Image 07Jan
    by 風文
    2022/01/07 by 風文
    Views 764 

    할 말과 못할 말

  12. No Image 01Dec
    by 風文
    2021/12/01 by 風文
    Views 852 

    공적인 말하기

  13. No Image 01Dec
    by 風文
    2021/12/01 by 風文
    Views 660 

    더(the) 한국말

  14. No Image 15Nov
    by 風文
    2021/11/15 by 風文
    Views 999 

    지명의 의의

  15. No Image 15Nov
    by 風文
    2021/11/15 by 風文
    Views 761 

    유신의 추억

  16. No Image 10Nov
    by 風文
    2021/11/10 by 風文
    Views 688 

    주어 없는 말

  17. No Image 10Nov
    by 風文
    2021/11/10 by 風文
    Views 841 

    국민께 감사를

  18. No Image 02Nov
    by 風文
    2021/11/02 by 風文
    Views 948 

    방언의 힘

  19. No Image 02Nov
    by 風文
    2021/11/02 by 風文
    Views 957 

    평등을 향하여

  20. No Image 31Oct
    by 風文
    2021/10/31 by 風文
    Views 624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선한 기업이 성공한다

  21. No Image 31Oct
    by 風文
    2021/10/31 by 風文
    Views 972 

    외부인과 내부인

  22. No Image 31Oct
    by 風文
    2021/10/31 by 風文
    Views 602 

    개헌을 한다면

  23. No Image 30Oct
    by 風文
    2021/10/30 by 風文
    Views 627 

    소통과 삐딱함

  24. No Image 30Oct
    by 風文
    2021/10/30 by 風文
    Views 764 

    말의 미혹

  25. No Image 28Oct
    by 風文
    2021/10/28 by 風文
    Views 766 

    난민과 탈북자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