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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죽박죽

여럿이 마구 섞여 엉망이 된 상태. 요 며칠 사이 가장 많이 떠오른 단어. ‘엉망진창, 뒤범벅, 난장판’이란 말이 함께 떠돈다. 장마는 눈앞의 살림살이와 논밭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고 하늘뜻을 잃은 사람들의 패악질은 사람들의 정신줄을 헝클어뜨렸다. 허탈과 분노.

말에는 이런 뒤죽박죽이 제한적으로 허용되기도 한다. ‘쏟아지는 빗물과 튀어 오른 흙탕물로 온 동네가 엉진망창이 되어 있었다.’ 잘 읽었는가? 사람들은 글을 읽을 때 단어를 이루는 글자들을 하나하나씩 읽지 않고 한 덩어리로 읽는다. 철자가 비슷하기만 하면 아는 단어로 보고 다음 말로 넘어간다. 뒤에 흠집이 조금 있어도 눈치를 못 챈다. 글줄깨나 읽은 사람들이 더 그런다. 아는 단어일수록 더 잘 속는다. 판에 박힌 생각이 변화를 못 알아차리는 법.

외국여행 후기에 곧이곧대로 비판글을 올리기 뭣할 때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한다. ‘카이펫랑 화실장에 바벌퀴레 엄나청게 나니옵다’라는 식이다. 첫 글자와 끝 글자는 놔두고 그 사이에 있는 글자를 뒤섞었는데 얼추 읽어낼 수 있다. 말소리를 음절 단위로 모아써서 가능한 놀이이다. 번역기를 돌려도 알 수 없던 외국인 집주인은 예약이 끊긴다거나 하는 뒤통수를 맞는다.

우리는 세상을 현미경처럼 보지 않고 어림짐작과 넘겨짚기로 바라본다. 전체 흐름과 맥락 속에 개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거나 추론한다. 거리두기로 우리가 맺어왔던 관계를 재음미하고 타인을 향한 연민과 그리움이야말로 사람다움의 길이란 걸 알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반칙자들이 쑥 들어왔다. 하나 이들도 ‘뒤박죽죽’ 우리 이웃.



말썽꾼, 턱스크

말에도 말썽꾼이 있다. 보통 새말은 이미 있는 말을 재활용한다. ‘유리’와 ‘창’이 만나 ‘유리창’이 되고 ‘팥’과 ‘빙수’를 더해 ‘팥빙수’를 만든다. 콩 심은 데 콩 나듯 자연스럽다.

그런데 말의 말썽꾼은 낱말의 목을 댕강 잘라 다른 말의 허리춤에다 이어 붙여 버린다. 이를 혼성어라 하는데, ‘라볶이’(라면+떡볶이), ‘호캉스’(호텔+바캉스), ‘강통령’(강아지+대통령), ‘브로맨스’(브라더+로맨스) 같은 말이다. 댓글이 엉망이면 ‘댓망진창’이고 김씨가 엉망이면 ‘김망진창’이다. ‘턱스크’(턱+마스크), ‘등드름’(등+여드름), ‘언택트’(언+콘택트)는 앞말이 1음절이지만 뒷말의 허리를 잘라 붙였으니 같은 부류다. ‘짜파구리’는 혼성의 중첩. ‘짜파게티’가 이미 ‘짜장면+스파게티’의 혼성인데, 여기에 다시 ‘너구리’를 잘라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가 되었다.

약간의 규칙성도 있다. 앞말은 앞부분을, 뒷말은 뒷부분을 남겨서 붙인다. 한쪽은 머리채를 잡혔고 다른 쪽은 꼬리를 잡혔으니 몸뚱이를 숨겼어도 다 잡힌 거와 진배없다. 새말을 만드는 좋은 전략인지 한 해 동안 생긴 신어 가운데 25%가 혼성어라 한다.

문제는 혼성이 원래의 단어가 갖고 있던 존재 근거를 흔들어 놓는다는 점이다. 망측하게도 한 단어인 ‘너구리’를 잘라 ‘너’는 동댕이치고 ‘구리’만 갖다 쓰다니! 말의 입장에선 순교. 어원이나 질서를 따지는 분에게는 속 쓰린 일이겠지만, 새말을 만드는 사람들은 오직 말맛이 살고 입에 착 달라붙는지가 기준이다. 이런 말썽꾼들 덕분에 사는 게 아주 심심하지는 않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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