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98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사투리 쓰는 왕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생각과 취향은 어디에서 올까? 부질없는 욕심은 스스로 자라나는 걸까? 돈의 존재가 돈에 대한 생각을 부추기듯, 표준어의 존재는 표준어에 대한 열망을 부른다. 표준어 중심의 사회는 표준어를 추앙하게 만들었다. 사투리는 보존 대상일지는 몰라도, 욕망의 대상은 아니다. 사투리는 반격과 복권의 기회를 얻을까?

2년 전 포항의 독립출판인인 최현애씨는 여러 소수 언어로 <어린 왕자>를 번역하는 독일 출판사의 문을 두드려, ‘경상도 사투리판’ <애린 왕자>를 펴냈다. 그해 가을, 언어학자 심재홍씨는 ‘전라도 사투리판’ <에린 왕자>를 냈다. 지난해엔 제주에서 잡지를 발행하고 있는 이광진씨가 ‘제주도 사투리판’인 <두린 왕자>를 펴냈다.

이들 책은 결코 눈으로만 읽을 수 없다. 고유한 억양과 장단음을 섞어 소리 내어 읽게 된다. 비로소 말은 평평한 표준어에서 빠져나와 두툼한 질감을 갖고 출렁거린다. 정말 그런지 잠깐 읽어보련?

“니가 나를 질들이모 우리사 서로 필요하게 안 되나. 니는 내한테 이 시상에 하나뿌인기라. 내도 니한테 시상에 하나뿌인 존재가 될 끼고.”(경상도, <애린 왕자>)

“니가 날 질들이믄 말이여, 우덜은 서루가 서루헌티 필요허게 될 거 아닌가잉. 넌 나헌티 시상서 하나밲에 없게 되는 것이제. 난 너헌티 시상서 하나밲에 없게 되는 거고잉.”(전라도, <에린 왕자>)

“만약 느가 날 질들이민 그땐 울리는 서로가 필료허여지는 거라. 나신디 넌 이 싀상에서 단 호나인 거주. 너신디 난 이 싀상 단 호나뿐인 거곡.”(제주도, <두린 왕자>)

생각은 어디에서 올까? 다르게 말하면 다르게 생각한다.



얽히고설키다

일이나 관계, 감정 따위가 복잡하게 꼬여 있을 때 ‘얽히고설키다’란 말을 쓴다. 그런데 그 표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왜 ‘얼키고설키다’나 ‘얽히고섥히다’로 적지 않고 ‘얽히고설키다’로 쓰는 걸까? 같은 ‘키’ 소리가 반복되는데 앞의 것은 ‘히’로, 뒤의 것은 ‘키’로 적는다.

‘얽히고설키다’, 이 말의 표기엔 우리말 맞춤법의 원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알면 다른 웬만한 것들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소리대로 적는다는 것은 ‘구름, 하늘’처럼 우리말의 발음에 따라 그대로 표기하는 것이다. 어법에 맞게 적는 것은 ‘구르미, 하느리’로 소리 나는 말들을 ‘구름이, 하늘이’로 구분해서 적는 것이다. 이것은 ‘구름’과 ‘하늘’에 ‘이’가 결합해서 그 말들이 문장의 주어 역할을 한다는 것을 쉽게 나타내 준다. 만약 소리대로만 적는다면 ‘구름과, 구르미, 구르믈’처럼 같은 뜻을 나타내는 말이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적힐 것이다. 그러면 ‘구름과, 구름이, 구름을’로 적을 때처럼 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읽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같은 뜻을 지닌 말은 항상 같은 형태로 적는 것이 어법에 맞도록 하는 원칙이다.

‘얽히고설키다’에서 ‘얽히다’는 ‘얽다’에서 온 말이다. ‘이리저리 관련이 되게 하다’를 뜻하는 ‘얽다’에 ‘히’가 붙어서 된 말이므로 어법에 맞게 쓰는 원칙에 따라 ‘얽히다’로 쓴다. ‘설키다’는 ‘섥다’가 우리말에 따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섥히다’로 적을 이유가 없다. 따라야 할 어법이 없으므로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설키다’로 적는다. 그래서 ‘얽히고설키다’란 표기가 생겨난 것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35250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1776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196595
3168 드라이브 스루 風文 2023.12.05 932
3167 콩글리시 風文 2022.05.18 933
3166 까치발 風文 2023.11.20 935
3165 만인의 ‘씨’(2) / 하퀴벌레, 하퀴벌레…바퀴벌레만도 못한 혐오를 곱씹으며 風文 2022.11.18 936
3164 어떤 문답 관리자 2022.01.31 942
3163 정치인의 애칭 風文 2022.02.08 943
3162 되묻기도 답변? 風文 2022.02.11 948
3161 한글의 약점, 가로쓰기 신문 風文 2022.06.24 948
3160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IMF, 막고 품어라, 내 인감 좀 빌려주게 風文 2022.02.01 949
3159 성인의 세계 風文 2022.05.10 952
3158 귀 잡수시다? 風文 2023.11.11 952
3157 무술과 글쓰기, 아버지의 글쓰기 風文 2022.09.29 954
3156 국민께 감사를 風文 2021.11.10 957
3155 질문들, 정재환님께 답함 風文 2022.09.14 959
3154 두꺼운 다리, 얇은 허리 風文 2023.05.24 960
3153 한자를 몰라도 風文 2022.01.09 961
3152 마녀사냥 風文 2022.01.13 962
3151 도긴개긴 風文 2023.05.27 962
3150 남과 북의 협력 風文 2022.04.28 964
3149 붓다 / 붇다 風文 2023.11.15 964
3148 할 말과 못할 말 風文 2022.01.07 965
3147 지식생산, 동의함 風文 2022.07.10 96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