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11.22 09:31

몰래 요동치는 말

조회 수 95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몰래 요동치는 말

아무래도 나는 좀스럽고 쪼잔하다. 하는 공부도 장쾌하지 못하여 ‘단어’에 머물러 있다. 새로 만들어진 말에도 별 관심이 없다. 겉모습은 그대로인데 속에선 요동치는 말에 관심 가지는 정도. 이를테면, ‘연필을 깎다’와 ‘사과를 깎다’에 쓰인 ‘깎다’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하는 정도. 뜻이 한발짝 옆으로 옮아간 ‘물건값을 깎다’도 아니고, 그저 ‘연필’과 ‘사과’에 쓰인 ‘깎다’ 정도.

연필 깎는 칼과 사과 깎는 칼은 다르다. 연필 깎는 칼은 네모나고 손가락 길이 정도인 데다가 직사각형이다. 과일 깎는 칼은 끝이 뾰족하고 손을 폈을 때의 길이 정도이다. 연필은 바깥쪽으로 칼질하지만, 사과는 안쪽으로 해야 한다.

연필은 집게손가락 첫째 마디 위에 연필 끝을 올려놓고 반대편 손 엄지손가락으로 칼등을 밀어내며 깎는다. 사과는 손바닥으로 사과를 움켜쥐고 반대편 손은 사과 표면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넓게 벌렸다가 집게손가락에 닿아 있는 칼등을 엄지손가락이 있는 데까지 끌어당기면서 깎는다. 둘은 다르다고 해야겠군!

그래도 깎는 건 깎는 거니까 같다고? 좋다. 그러면 둘 다 같은 칼로, 같은 방향으로 깎는다고 치자. 그러면, 둘은 같은가? 행위에는 목적이나 결과가 있다. 연필을 깎으면 글을 쓰지만, 사과를 깎으면 먹는다. 두 동작(작동)의 목표와 결과는 다르다.

‘깎다’라는 말은 관념 속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사물과 연결된 미세한 행동방식과 함께 몸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온 감각을 동원하여 지각하며 이해하며 행위한다. 말은 말 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외부 환경에 조응하는 몸의 감각과 함께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 족하다. 좀스럽긴 하지만.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1. No Image notice by 바람의종 2006/09/16 by 바람의종
    Views 44078 

    ∥…………………………………………………………………… 목록

  2.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3. No Image notice by 風磬 2006/09/09 by 風磬
    Views 205743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4. No Image 05Dec
    by 風文
    2023/12/05 by 風文
    Views 1157 

    드라이브 스루

  5. No Image 05Dec
    by 風文
    2023/12/05 by 風文
    Views 979 

    상석

  6. No Image 27Nov
    by 風文
    2023/11/27 by 風文
    Views 1393 

    흰 백일홍?

  7. No Image 25Nov
    by 風文
    2023/11/25 by 風文
    Views 1152 

    '마징가 Z'와 'DMZ'

  8. No Image 25Nov
    by 風文
    2023/11/25 by 風文
    Views 1111 

    반동과 리액션

  9. No Image 24Nov
    by 風文
    2023/11/24 by 風文
    Views 1272 

    ‘개덥다’고?

  10. No Image 24Nov
    by 風文
    2023/11/24 by 風文
    Views 892 

    내색

  11. No Image 22Nov
    by 風文
    2023/11/22 by 風文
    Views 1074 

    '밖에'의 띄어쓰기

  12. No Image 22Nov
    by 風文
    2023/11/22 by 風文
    Views 950 

    몰래 요동치는 말

  13. No Image 21Nov
    by 風文
    2023/11/21 by 風文
    Views 1008 

    군색한, 궁색한

  14. No Image 21Nov
    by 風文
    2023/11/21 by 風文
    Views 1153 

    주현씨가 말했다

  15. No Image 20Nov
    by 風文
    2023/11/20 by 風文
    Views 1115 

    ‘가오’와 ‘간지’

  16. No Image 20Nov
    by 風文
    2023/11/20 by 風文
    Views 1117 

    까치발

  17. No Image 16Nov
    by 風文
    2023/11/16 by 風文
    Views 995 

    쓰봉

  18. No Image 16Nov
    by 風文
    2023/11/16 by 風文
    Views 949 

    부사, 문득

  19. No Image 15Nov
    by 風文
    2023/11/15 by 風文
    Views 1090 

    저리다 / 절이다

  20. No Image 15Nov
    by 風文
    2023/11/15 by 風文
    Views 1144 

    붓다 / 붇다

  21. No Image 15Nov
    by 風文
    2023/11/15 by 風文
    Views 1183 

    후텁지근한

  22. No Image 15Nov
    by 風文
    2023/11/15 by 風文
    Views 1052 

    조의금 봉투

  23. No Image 14Nov
    by 風文
    2023/11/14 by 風文
    Views 1139 

    본정통(本町通)

  24. No Image 14Nov
    by 風文
    2023/11/14 by 風文
    Views 1182 

    기역 대신 ‘기윽’은 어떨까, 가르치기도 편한데

  25. No Image 11Nov
    by 風文
    2023/11/11 by 風文
    Views 1153 

    귀 잡수시다?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