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03.06 06:34

“김”

조회 수 145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김”

우리 딸은 아빠를 잘 이용한다. 밥을 푸러 일어나 두세 걸음을 옮길라치면 등 뒤에서 ‘아빠, 일어난 김에 물 한잔만!’. 안 갖다줄 수가 없다. 매번 당하다 보니 ‘저 아이는 아빠를 잘 써먹는군’ 하며 투덜거리게 된다. 중요한 건 때를 잘 맞추는 것. 늦지도 빠르지도 않아야 한다. 잠자코 기다리고 있다가 누군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면 먹이를 낚아채는 야수처럼 세 치 혀를 휘둘러 자기 할 일을 슬쩍 얹는다.

밥을 하면 밥솥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물을 끓이면 주전자에서 김이 뿜어져 나온다. 추운 날 내 입에서도 더운 김이 솔솔 나온다. 모양이 일정치 않고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다가 이내 허공에서 사라진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세상 이치를 집안에서 알아챌 수 있는 것으로 이만한 게 없다.

‘김’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 ‘장 보는 김에 머리도 깎았다’처럼 ‘~하는 김에’라는 표현을 이루어 두 사건을 이어주기도 한다. 단순히 앞뒤 사건을 시간순으로 연결하는 게 아니다. 앞일을 발판 삼아 뒷일을 한다는 뜻이다. ‘장을 보고 머리를 깎았다’와는 말맛이 다르다. 앞의 계기가 없다면 뒷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가능성이나 아쉬움으로 남겨두었겠지. 기왕 벌어진 일에 기대어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용기를 낸다. ‘말 나온 김에 털고 가자.’ ‘생각난 김에 전화해 봐.’ 변화를 위해선 뭐든 하고 있어야 하려나.

‘~하는 김에’가 숨겨둔 일을 자극한다는 게 흥미롭다. 잠깐 피어올랐다 이내 사라지는 수증기를 보고 뭔가를 더 얹는 상황을 상상하다니. 순발력 넘치는 표현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1. ∥…………………………………………………………………… 목록

    Date2006.09.16 By바람의종 Views45663
    read more
  2.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Date2007.02.18 By바람의종 Views192204
    read more
  3.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Date2006.09.09 By風磬 Views207310
    read more
  4. 댄싱 나인 시즌 스리

    Date2023.04.21 By風文 Views954
    Read More
  5. 막냇동생

    Date2023.04.20 By風文 Views905
    Read More
  6. 내연녀와 동거인

    Date2023.04.19 By風文 Views1033
    Read More
  7. 1.25배속 듣기에 사라진 것들

    Date2023.04.18 By風文 Views1214
    Read More
  8. 멋지다 연진아, 멋지다 루카셴코

    Date2023.04.17 By風文 Views1279
    Read More
  9. 어쩌다 보니

    Date2023.04.14 By風文 Views1356
    Read More
  10. '김'의 예언

    Date2023.04.13 By風文 Views1037
    Read More
  11. “김”

    Date2023.03.06 By風文 Views1458
    Read More
  12. 울면서 말하기

    Date2023.03.01 By風文 Views1084
    Read More
  13. ‘다음 소희’에 숨은 문법

    Date2023.02.27 By風文 Views1107
    Read More
  14. 남친과 남사친

    Date2023.02.13 By風文 Views1162
    Read More
  15. 국가의 목소리

    Date2023.02.06 By風文 Views1376
    Read More
  16. 말의 세대 차

    Date2023.02.01 By風文 Views1080
    Read More
  17. ‘통일’의 반대말

    Date2023.01.16 By風文 Views1523
    Read More
  18. 헛스윙, 헛웃음, 헛기침의 쓸모

    Date2023.01.09 By風文 Views1286
    Read More
  19. '바치다'와 '받치다'

    Date2023.01.04 By風文 Views1176
    Read More
  20. 말하는 입

    Date2023.01.03 By風文 Views1124
    Read More
  21. ○○노조

    Date2022.12.26 By風文 Views1144
    Read More
  22. 구경꾼의 말

    Date2022.12.19 By風文 Views1169
    Read More
  23. 맞춤법·표준어 제정, 국가 독점?…오늘도 ‘손사래’

    Date2022.12.12 By風文 Views1609
    Read More
  24. 평어 쓰기, 그 후 / 위협하는 기록

    Date2022.12.07 By風文 Views1705
    Read More
  25. ‘웃기고 있네’와 ‘웃기고 자빠졌네’, ‘-도’와 나머지

    Date2022.12.06 By風文 Views1215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