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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라는 외부

그대여, 외국어를 힘껏 배우라. 언어는 이 세계를 낱낱이 쪼개어 이름을 붙이고 그 속에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심어놓았으니. 우리의 운명은 모국어가 짜놓은 모눈종이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세계만이 유일하고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외국어는 모국어가 만들어놓은 그 질서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준다. 말소리에서부터 단어, 문법, 문자 등 우리와 다른 눈을 가진 사람들이 직조해놓은 말의 그물은 우리를 낯선 세계로 잡아당긴다.

외국어는 살갗과 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나와 모국어 사이에 틈을 만들어낸다. 살갗과 살 사이에 ‘산들바람 집어넣기’랄까(‘물집’이면 어떠랴)? ‘결정을 내리다’라는 말을 영어로는 ‘결정을 만든다(make)’고 하고, 불어로는 ‘결정을 잡는다(prendre)’고 한다. ‘그렇지, 결정은 내릴 수도 있지만, 만들 수도, 잡을 수도 있겠다’ 싶은 거다. ‘약속을 잡다’를 영어에서 ‘약 속을 만든다(make)’고 하듯이.

도저히 모국어로 번역되지 않는 말을 만났을 때, 그것은 벽의 체험이다. 외국어로 번역되지 않는 모국어가 있을 때, 그것은 낭떠러지의 체험이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다)’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독특한 감각은 외국어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벽과 낭떠러지는 득도의 경계선. 외국어라는 외부를 내 속에 영접해야 비로소 모국어를 알게 된다. 그래서 나의 모국어가 일종의 외국어처럼 낯설게 느껴질 때라야 모국어는 습관과 반복이 아니라 경탄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어느 대도시의 소란처럼 영어를 상용화하는 게 답일까?



‘영어’라는 내부

부산이 작정을 하고 영어 상용화에 뛰어들었다. 이전엔 변죽만 울리다 말더니 이번엔 기세가 좋다. 공문서 영어 병기, 표지판·공공시설물 영문 표기, 영어 능통 공무원 채용 확대, 영어국제학교 설립, 외국 전문대 유치, 권역별 영어마을 조성 등. 이전의 영어 공용화 방안을 살뜰히 모았다. 공문서나 공공시설물에 영어를 쓰는 게 국어기본법을 어긴다는 걸 알고 움찔한 상태지만, 포기하진 않을 듯. 힘껏 밀어붙이면 머지않아 부산은 영어로 ‘프리토킹’하는 도시가 될지도 모른다.

‘부산 살면 영어 하나는 잘하게 되겠다’며 부러워할 사람들이 많겠다. 겉으론 ‘우리말 사랑’을 외치지만 뒤로는 영어에 안달복달해온 민족이니. 한국인은 모국어 하나만으로 말글살이에 큰 어려움이 없다. 영어를 잘 못하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남녀노소 빈부귀천 좌우중도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영어’를 욕망한다. 영어는 우리 안에 들어온 외국어이고, 우리는 영어를 갈망하는 단일 언어 민족. 부산은 곧 영어 욕망의 메카가 될 거다.

그 욕망을 타박만 할 건가? ‘한국에선 영어 쓸 일 없다’, ‘한국어로 충분하다’, ‘자동번역기 쓰면 된다’고 하면 그 욕망이 사라질까? 영어상용도시 같은 불가능한 시도를 반복하는 근원을 캐묻자. 왜 그동안 다수 국민이 영어 실력을 갖추는 데 실패했는가? 외국인과 대화하고 영문소설을 읽을 정도의 실력을 ‘어디’에서 기르지? ‘사교육 시장’이다. 그러니 영어 격차가 문화자본으로 작동하여 계급 격차를 낳지. 학교가 문제다. 6년 정도면 영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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