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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도 없다

사람들은 과장하기를 좋아한다. ‘~도 없다’라는 말은 어떤 것의 부재를 과장하는 표현이다. 예컨대, 바라는 걸 안 하면 앞으로 받을 몫이 전혀 없다고 겁줄 때 쓰는 ‘국물도 없다’를 보자. 나는 어머니한테 ‘국보’라 불릴 만큼 국을 좋아했다. 줄기마저 흐물흐물해지게 끓인 미역국 국물을 유독 좋아했다. 국물을 후루룩 마시면서 깊고 그윽한 갯내를 함께 삼켰다. 그런데 ‘국물도 없다’고 하면서 국물을 가장 하잘것없는 음식 취급을 하니 이상했다. 여하튼 가장 하품인 국물도 없으니 굶으라!

‘~밖에 없다’는 말에도 과장이 섞여 있다. ‘너밖에 없다’고 하면 ‘너’ 말고는 아무도 없으며, ‘천 원밖에 없다’는 ‘천 원’ 외에 더 가진 돈이 없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안쪽에 뭐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도 없다’는 그것마저 없어서 더 극단적이다. ‘믿을 사람이 너 하나밖에 없다’고 하면 갑자기 둘이 한통속이 되지만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면 ‘듣는 나는 뭐지?’ 묻게 된다. ‘하나밖에 없다’는 ‘유일함(1)’을, ‘하나도 없다’는 ‘전무(0)’를 뜻하니 숫자로는 한 끗 차이지만 말맛은 하늘과 땅 차이다.

고향 마을엔 사람 그림자도 없는데 과잉도시 서울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비좁고 아무것도 없는 민중들은 죽을 짬도 없이 바쁘다. 쥐뿔도 없는 사람들이 눈코 뜰 새도 없이 일해서 집 한 칸 사는 건 이제 꿈도 못 꾼다. 사람들은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을 위한 정부를 원한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설’을 쓰는 게 아니다. 과장된 진실이다.



그림책 읽어 주자

흔히 문자 없는 사회를 미개한 사회로 취급한다. 문자생활은 현대인에게 필수다. 문자를 통해 대부분의 지식을 알게 된다. 사건은 문자로 기록되어 시공간을 뛰어넘어 전달된다.

하지만 문자 사회에서도 문자에 기대지 않은 영역이 얼마든지 있다. 말소리, 몸짓, 노래, 구전, 그림 같은 것들이다. 개인도 태어나서 몇 년 동안 ‘문자 없는 시기’를 보낸다. 부모들은 아이가 빨리 글을 익혀 책을 줄줄 읽기 바라겠지만, 얻는 만큼 잃는 게 많다. 문자를 익히게 되면 세상에 대한 감각과 상상력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말소리에는 높낮이, 길고 짧음, 빠르기 등 문자가 담을 수 없는 요소들이 녹아 있다. 이런 요소들은 소통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문자는 말소리의 풍부한 차이를 숨기고 추상화하여 압축 건조시킨다. 문자는 말소리에 비해 진부하다.

아이에게 문자 없는 시기를 충분히 즐기게 해주는 특효약이 그림책이다. 그림책은 보는 게 아니라 소리 내어 읽어 주는 책이다. 그림 위에 부모의 목소리가 얹힐 때 아이 머릿속에 이야기 하나가 펼쳐진다. 엉뚱한 생각과 질문이 많아진다. 읽어 주는 사람의 고유한 억양, 높낮이, 사투리, 멈칫거림, 헛기침, 훌쩍거림, 다시 읽기, 덧붙이기 등 갖가지 독특함과 실수와 변주가 행해진다.

동영상은 화면의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딴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림책은 그림과 그림 사이에 간격이 있어서 이 간격을 이야기와 상상력으로 채운다. ‘딴 생각(상상)’을 해야 한다. 목소리에는 고정된 그림을 살아 꿈틀거리는 사건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림책 읽어 주기가 좋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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