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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하다

‘심심한 사과’에 ‘난 하나도 안 심심해!’라 하여 일어난 소란이 일주일이 넘었으니 차분히 따져보자. 한심해할 일만은 아니고, 도리어 인간이 말의 의미를 어떻게 알아가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손뼉 칠 일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도 그랬다. 악한 게 쌓일수록 결국 좋은 시절이 온다는,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그러니 이 어둠을 참고 견디라는 말로 들렸다. 아뿔싸, 다른 뜻의 ‘구축’이 있었고, 정반대의 뜻이었다. 나쁜 게 좋은 걸 몰아낸다!

모든 존재가 그렇듯, 단어도 홀로 있으면 의미가 미분화 상태이다. 일정한 맥락 속에 놓일 때 비로소 꽃이 핀다. 생소한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배경지식을 동원해 그 뜻을 추적한다. 우리의 ‘해석’ 행위는 계산기처럼 각 단어의 의미를 미리 정확히 알고 나서 이들을 합해나가는 게 아니다. 경험, 상상, 추리를 바탕으로 한 도약에 가깝다. 넘겨짚기, 또는 눈치로 때려 맞추기랄까?

예컨대, ‘우리 팀이 3연패를 달성했다’와 ‘우리 팀이 7연패에 빠졌다’에 쓰인 ‘연패’가 앞뒤 맥락이나 선수들의 표정으로 보아 전혀 다른 상황일 듯하고, 웃으며 ‘노고에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라고 할 때와 고개를 숙이며 ‘이번 사태에 사의를 표합니다’라고 할 때의 ‘사의’가 다른 뜻이라고 추측한다. 어휘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지만, 맥락과 상황이 던지는 작은 실마리로 의미를 추리하는 탐정의 마음이 작동하는 것이다. 거기엔 실패도 있고, 오역도 있고, 도약도 있는 거다. 우리 정신은 이 세계를 향해 영원히 열려 있다.


‘평어’를 쓰기로 함

‘할까? 말까?’ 방학 내내 오락가락했다. 출석을 부를 때 ‘예’가 아닌 ‘응, 어’로 대답하는 놀이만으로도 학생들은 안절부절못했는데, 이런 전면적 실험을 감당할 수 있을까. 반발심에 튕겨나가거나 나를 ‘또라이’로 여길지도 모르지. 그래도 하자! 오늘부터 수업시간에 ‘평어’를 쓰기로 한다.

<예의 있는 반말>이란 책에서 제안하는 원리는 간단하다. 첫째, 모든 호칭은 이름만 부르는 것으로 통일. 뒤에 따로 뭘 붙이지 않는다. ‘철수야, 철수씨, 철수님’이 아니라 ‘철수’라 한다. 학생들도 나를 ‘선생님’이 아니라 ‘진해!’라 부르면 된다(아, 떨려). 둘째, 모든 존대법을 걷어내고 반말로만 대화하기. 학생들은 나에게 ‘숙제가 뭐야?’라 할 것이다(아, 무서워). 존대법(높임법)은 모든 문장에 상대나 언급되는 대상이 나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반드시 표시하라는 규칙이다. 평어는 존댓말과 반말이라는 수직구조를 허물 것이다.

평어를 쓰려니 바꿀 게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수업방식을 ‘강의’가 아닌 ‘대화’로 바꿔야 한다. 혼자 떠들면, 그건 선생이 반말로 수업하는 것밖에 안 된다. 학생들의 평어를 들어야 하니, 나는 말을 줄이고 학생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혼란과 모색, 초월을 겪는지 보고 싶다.

평어 사용은 우리가 동료로서 갖춰야 할 친밀감과 함께 적절한 거리 확보를 통한 평등의 감각을 느껴보자는 거다. 위계적 문법체계를 의지적으로 내려놓았을 때 우리 안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실패도 좋다. 교실은 딴딴한 댐을 무너뜨릴 못과 망치를 만드는 실험실이자 엉뚱한 짓을 결행하는 아지트이니.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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