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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

인간은 게을러서 짧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렇게 말을 줄이는 일이 과도하여 요상한 상황을 연출한다.

재수 없거나 기분 나쁘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면 ‘밥맛’이다. 밥맛이 떨어질 정도로 기분 나쁘다. 애초에 ‘밥맛이 있다/없다’는 음식 맛을 평가하거나 식욕의 유무를 나타낸다. ‘밥맛이다’가 불쾌한 감정일 이유가 없다. 그러다가 아니꼬운 사람이 나타나면 ‘밥맛없다’ ‘밥맛 떨어지다’라는 말 뒤에 붙은 ‘없다’나 ‘떨어지다’를 싹둑 잘라내고 ‘밥맛’만으로 불쾌한 마음을 표현한다. ‘밥맛’ 입장에서는 뒤에 붙은 서술어의 부정적인 의미마저 모두 넘겨받은 셈이다.

그러다 보니 한 낱말에 긍정과 부정의 의미가 동침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잘났다’가 상황에 기대어 반대로 쓰이는 것과는 다르다. 부정의 의미를 늘 갖고 있는 느낌이다. ‘엉터리’도 비슷하다. ‘엉터리없다’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라면 ‘엉터리’는 ‘이치에 맞는 행동’이어야 이치에 맞는다. 그런데도 ‘엉터리’와 ‘엉터리없다’는 뜻이 같다. ‘안절부절못하다-안절부절’ ‘주책없다-주책(이다)’ ‘싸가지 없다-(왕)싸가지’도 마찬가지다.

‘바가지를 긁다’ 같은 숙어도 한 요소가 전체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어디서 바가지야!’ ‘그만 긁어!’ 전체 의미를 한 낱말이 넘겨받은 것이다. ‘밥맛이다’는 이게 과도하게 작동한 예이다. 뭔가가 ‘없다’는 것은 앞말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라 매우 중요하다. ‘없다’를 지우고 부정의 의미를 앞말에 모두 넘겨주는 건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가끔 말은 선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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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미 천국

한국어는 최고로 배우기 어려운 말이다. 동사에 ‘반드시’ 어미를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는 기본형에 과거형, 과거분사형, 진행형만 알면 된다. ‘play, plays, played, playing’ 말고 다른 형태가 없다. 그러니 앉은자리에서 ‘I play a game.’이라고 한마디 할 수 있다. 한국어는 동사에 붙는 꼬리가 무시무시하게 많다. 어미 천국이자 어미계 사회(!)라 어미 없이는 말을 끝맺을 수 없다. ‘하다’라는 동사를 제대로 쓰려면 ‘한다, 해(요), 합니다, 했다, 했어(요), 했습니다, 하겠다, 하겠어(요), 하겠습니다’처럼 시제와 상대 높임 여부를 반드시 표시해야 한다. 여기에 의문, 명령, 감탄, 청유형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형태가 늘어난다.

문장을 연결하는 어미도 많다. ‘하고, 하며, 하면, 해서, 하니까, 하는데, 해도, 하자마자, 하지만, 하나, 하더라도, 할지언정, 할지라도, 할까, 하느라, 할뿐더러, 하러, 하려고, 하게….’ 예만으로도 이 지면이 모자란다.

앞뒤 말을 이어 붙이는 접착제가 이리 많은데도 성에 안 찼는지 명사를 끌어들인다. 예컨대, 이유를 말하는 데 ‘하느라, 해서, 하니까’ 정도의 어미면 충분한데, 굳이 ‘했기 때문에’ ‘하는 바람에’ ‘한 덕분에’ ‘한 탓에’ ‘하는 통에’ 따위를 만들어 쓴다. 동사 하나를 배우고 이를 활용하여 말 한마디 하려면 이렇게 많은 어미 중에 하나를 골라 조합해야 한다. 이를 익히는 일은 현기증에 구토를 수반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한국어 학습자에게 박수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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