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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글쓰기

아버지는 광부였다. 광산 붕괴 사고로 코를 다친 다음에는 목수가 되었다. 그 후로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매일 일기를 썼다. 몰래 일기장을 펼치면 ‘절골 김○○씨네 지붕 슬라브(슬래브) 공사 2만원’, ‘문곡 황씨네 담장 수리 1만원’, ‘황지시장 실비집에서 권○○과 대포 한잔. 내가 냄.’ 식이었다. 매일 쓰는 아버지의 글쓰기는 당최 늘지 않았다. 재작년과 어제의 일기가 매일반이었다. 하루를 포대기 하나에 다 쓸어 담아서 그렇다.

혹시 당신이 글쓰기에 관심이 있다면 글쓰기는 사건을, 대상을, 생각을 잘게 쪼개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건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오늘 아침 맨 처음 한 일이 뭔가? 양치질? 그냥 ‘양치질을 했다’고 퉁치면 안 된다. 그걸 종이 한 장 가득 쓸 수 있어야 한다. 조금밖에 남지 않은 치약을 양 손가락으로 눌러 낡아 뭉개진 칫솔 위에 짜 윗니부터 아랫니로 앞니에서 어금니 쪽으로, 마지막으로 헛구역질을 하며 엷게 낀 혀의 백태를 닦고 수도꼭지에 얼굴을 왼쪽으로 돌려 물을 한 모금 머금은 다음에 올칵올칵 입을 헹구고는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며 혀를 날름 내밀어보았다, 고 해야 한다.

글쓰기는 시간을 달리 대하는 일이다. 쓰지(기억하지/말하지) 않으면 시간(인생)은 장맛비에 젖어 떡이 된 책처럼 된다. 쓴다는 건 한 덩어리가 된 시간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떼어내어 구겨지고 얼룩진 종이 위에 적힌 흔적들을 다시 읽는 일이다. 글을 쓰다 보면 시간에 대한 감각이 달라진다. 시간만이겠나. 모든 생명은 특이하며 순간순간이 유일무이하다는 것쯤은 알게 되지 않겠나.


무술과 글쓰기

여러 동작을 할 수 있으면 뭐 하나. 하나라도 정확하게 할 수 있어야지. 합기도 (Aikido) 에 ‘ 전환 ’ 이라는 동작이 있다. 쉽다. 정면을 향해 발을 앞뒤로 벌려 선다. 앞발을 축으로 삼아 시계 반대 방향으로 180 도 돌면 된다.   흐느적대지 말고 중심을 유지하면서 재빨리 돌라. 뒷발은 가급적 직선으로 움직이되 몸은 팽이처럼 탄력 있게. 시선은 저 멀리 지평선을 향하고. 이 쉬운 동작은 초보자뿐만 아니라 십수 년을 수련한 유단자들도 매일 반복한다. 반복하면서 생각한다. 무게 중심을 어느 정도 분배할지, 뒷발을 끌지 살짝 띄울지, 다리를 어느 정도 구부릴지, 이런 생각을 하며 돌지, 생각을 하지 않고 돌지!

생각을 카메라로 찍어주는 기계가 있으면 좋겠다. 세숫대야 물을 마당에 끼얹듯, 생각했던 것이 종이 위에 글자들로, 단어들로, 문장들로 쫙 뿌려지는 기계 말이다. 그런데 이놈의 글쓰기는 왜 생각대로 안 되는가. 생각에서 문장이 튀어 오르는 건 분명한데, 그렇다고 머릿속에 문장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쓰레기봉투에 담긴 유리 조각처럼 뚫고 나올 뿐. 글쓰기와 생각은 차원이 다르다. 글쓰기는 언제나 일차원이었다. 생각이 많다고 잘 쓰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다고 못 쓰는 것도 아니다. 글쓰기는 생각보다는 행동하기에 가깝다. 쓰고 나서야 뭘 쓰려 했는지 알게 된다. 쓰지 않은 생각은 아무 생각도 아니다. 쓰고 나서 생각하라는 말은 그래서 적절하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문보다는 무에 가깝다. 반복이 최우선이다. 동분서주할 필요도 없다. 소재 하나로 꾸준히 반복하면 된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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