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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씨’(2)

나는 지난주에 ‘신문은 예외 없이 모든 이름 뒤에 ‘씨’를 쓰자’는 허무맹랑한 칼럼을 썼다. ‘발칙한’ 학생 하나가 ‘이때다’ 싶었던지 카톡으로 나를 불렀다, ‘교수 김진해씨!’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이 믿음직한 청년을 당장 잡아들여 곤장을 쳐야겠으나, 먼저 밥이라도 사먹여야겠다. 그 학생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말하기(구어)와 쓰기(문어)를 같은 것 또는 일치시켜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쓰기는 말하기를 받아 적는 것, 그게 언문일치지! 하지만 말하기와 쓰기는 엄연히 다르다. 상대방을 앞에 두고 ‘구보 작가님’이라 부르는 것과 신문에 ‘소설가 구보씨가 새 책을 냈다’고 쓰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신문의 호칭 체계엔 이미 신문만의 고유한 위계질서가 녹아 있다. 같은 업계 종사자라도 감독, 연출, 피디, 작가는 이름 뒤에 직함을 붙이지만, 배우는 아무것도 안 붙인다. 배우 이정재씨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했어도 대부분의 신문은 ‘이정재 감독’이라 하지 않고 ‘감독 이정재’라 한다. ‘배우 이정재’로 쓰던 버릇을 버릴 수 없었던 게지. 대통령 부인을 ‘여사’라 할지 ‘씨’라 할지 논쟁할 때도 ‘조선의 4번 타자’를 이대로 ‘이대호’라 할지, ‘이대호 선수’라 할지, ‘이대호씨’라 할지 토론하지 않는다.

문어(글말)의 일종으로서 특수한 지위를 누려온 신문이 어떤 식으로 사람들을 호명해왔는지에 대해 언론인들끼리 점검해보길 권한다. 고유한 호칭 체계의 발명은 위계적인 말의 질서를 평등하게 바꾸는 너울이 될지도 모른다.(*대우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 유최안씨의 쾌유와 안녕을 빈다.)


하퀴벌레, 하퀴벌레…바퀴벌레만도 못한 혐오를 곱씹으며


그렇다. 말은 깨진 거울이다. 사회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비추면서도, 깨진 틈 사이로 세계를 구기고 찢어버린다. 특히, 혐오표현은 한 사회의 균열상과 적대감의 깊이를 드러낸다. 흔한 방식이 ‘급식충, 맘충, 틀딱충’처럼 사람을 벌레 취급하는 것.

대상을 규정짓는 말이 만들어진다고 그걸로 끝이 아니다. 물에 잉크가 퍼져나가듯, 상상은 그 말을 씨앗 삼아 번져나간다. 하청노동자를 ‘하퀴벌레’(하청+바퀴벌레)로 부르자마자, 그 말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와 감정이 불뚝거리고, 대하는 방식도 정해진다. 사람을 벌레로 부른 이상, ‘벌레 대하듯’ 하면 된다. 불결하고 불순하고 해로운 존재이므로 하나하나 박멸하거나, 한꺼번에 몰살시켜야 한다. 적어도 눈앞에서 얼쩡거리지 않게 쫓아내야 한다. 거기에 가해지는 폭력은 정당하고 필요하기까지 하다.

‘어떤 말을 썼느냐?’보다 ‘누가 썼느냐?’가 더 중요하더라. 누가 썼느냐에 따라 의미는 달라지나니. 일본 극우세력들이 ‘바퀴벌레, 구더기’라고 부르는 사람은 재일 한국인·조선인들이다. ‘하퀴벌레’란 말이 원청 노동자들한테서 나왔다는 게 더욱 아프다. 당장의 곤궁함을 야기한 사람들을 ‘해충’으로 지목함으로써 파업으로 일 못 하는 개개인의 불만을 집단화하고, 약자에 대한 반격의 용기와 논리를 제공해준다. 한치의 양보나 측은지심,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다. 그 뒤에 있는 불평등 구조를 보라고? 이 분열을 조장한 무능한 정치를 보라고? 물론 봐야지.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하퀴벌레’란 말을 곱씹으며, 우리 사회의 내적 분열을 스산한 눈으로 바라볼 뿐.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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