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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표현

 ‘개인적으로 그 결정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똑 부러지게 말하는 게 멋져 보이지만, 항상 그럴 수 없다. 누구에게든 직설화법은 부담이 간다. 시원하게 ‘그 결정은 옳지 않소!’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말도 전쟁보다는 평화를 좋아한다. 내 주장이 지나치게 직설적이지 않고 한계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대결보다는 공존과 협력적 말하기를 꾀한다. 그러한 장치를 ‘울타리 표현’이라고 부른다. 스스로 자기 발언에 확신 없음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하고 상대에게 신뢰를 얻는 역설적 책략이다.

‘개인적으로는’, ‘제 생각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더 살펴보긴 해야겠지만’, ‘잘은 모릅니다마는’ 같은 군더더기 말을 씀으로써 발언 내용이 자신에게 국한되거나 불확실하기 때문에 상대에게 강요할 의도가 없음을 내비친다. ‘듯싶다, ~일 수도 있다, ~일지도 모른다’ 같은 표현도 직접성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든다. ‘맛있다’를 ‘맛있는 거 같다’고 하는 것도 주장을 추측으로 강등시킴으로써 상대에게 다른 판단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른바 ‘원전마피아들’은”, “속된 말로 ‘삥뜯기’는”과 같이 특정 개념 앞에 ‘이른바, 속된 말로, 시쳇말로’를 씀으로써 해당 개념과 그 말을 쓰는 자신 사이에 빠져나갈 공간을 만든다.

자기 견해를 ‘별것 아닌 것’처럼 만들어 상대방에게는 생각의 여지를, 나에게는 안전을 보장하는 비책인데 적당히 써야 좋다. 지나치면 비굴해 보일 수 있고, 인색하면 소위 ‘완고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지나치면 비굴하고, 인색하면 완고하다!).


끝없는 말

‘생각이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생각나는 것이 생각이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수학여행 때 숙소 벽에 적혀 있던 낙서였는데, 저렇게 긴 문장이 수십년 후에도 기억나는 걸 보면 퍽이나 감명을 받았었나 보다.

이론상 문장의 길이와 종류는 끝이 없다. 명사에 ‘~와’만 붙여도 계속 늘릴 수 있다(‘우리집엔 나무숟가락과 모자와 도끼와 우쿨렐레와 꽃과 나무가 있다’). 동사 끝에 ‘~고’만 붙여도 한 문장으로 날밤을 새울 수 있다(‘나는 눈을 떴고 씻었고 방청소를 했고 밥을 먹었고…’).

형광등 갈아끼우듯, 같은 틀에 단어만 바꾸면 새 문장을 무한히 만들 수 있다. 주어 자리에 100개, 목적어 자리에 100개, 서술어 자리에 100개의 단어가 있다면 만들 수 있는 문장은 100×100×100=100만개나 된다. 여기에 ‘나는 냉면과 국수를 먹었다’처럼 목적어 자리에 ‘~와’ 하나만 넣어도 1억개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 더 정교하게는 문장 안에 작은 문장을 집어넣는 것이다. ‘목수일을 하는 형을 좋아하는 친구가 만든 연극을 본 우리들이 만난 배우들이 찍은 사진이 예뻤다.’처럼 명사를 꾸미는 말을 계속 덧댈 수 있다.

말은 무한하다. 무한히 바꾸고 이어붙이는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세계는 시시때때로 변하고, 세계를 마주한 개인의 감각도 속절없이 변한다. 말은 세계를 담고 이해하는 데 최적의 형식이다. 우리의 문장이 진부하고 식상한 이유는 몇개 되지 않는 기성의 문장을 반복하는 게 안전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용기 없고 게으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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