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52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형용모순

아무래도 인간은 복종보다는 삐딱한 쪽을 선택한 듯하다. 말에도 꾸미는 말과 꾸밈을 받는 말이 날카롭게 맞서는 형용모순이란 것이 있다. ‘네모난 동그라미’ 같은 표현이 그 예이다. 현실에 존재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당신 머릿속에서는 어느새 동그라미를 네모나게 누르거나 네모를 동그랗게 당기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표현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한다. 모종의 진실을 담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맞이하여 ‘침묵을 듣는 이’에게 강으로 오라고 청할 수 있다. ‘눈뜬장님’과 함께 ‘산송장’이 된 친구의 병문안을 갈 수도 있다. 형용모순은 생활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다시마 육수’에는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닭개장’에는 개고기가 없다. 어느 냉면집에선 ‘온냉면’을 끓여 판다. ‘아이스 핫초코’는 땀을 식혀준다.

종교에 쓰인 형용모순은 반성 없는 일상에 대한 각성의 장치다. 도를 도라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도가 아니다. 부처가 있으면 그냥 지나가고 부처가 없으면 더 냉큼 지나가라. 예수는 원래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비워 사람이 되었다. 가난하고 비통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이런 형용모순도 있다. 가령, ‘시민군’. ‘시민’이면서 ‘군인’. 비극적 결합이다. 총을 만져본 적도 없는 학생들도 있었다. 39년 전 오늘, 새벽 도청의 시민군은 계엄군에게 모두 사살, 체포되었다. 진압 후 계엄군은 능청스레 광장 분수대 물을 하늘 높이 솟구치도록 틀었다고 한다. 

……………………………………………………………………………………………………………


 언어의 퇴보

말 몇마디만 듣고도 그 사람 고향을 어림잡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게 꽤나 솔깃했던지 동서양 가릴 것 없이 발음으로 네 편 내 편 갈라 해코지를 한 사례들이 많다.

‘쉽볼렛 테스트’라는 유명한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길르앗과 에브라임이라는 유다의 두 파벌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패전한 에브라임 사람들이 강을 건너 도망치는데, 길르앗 사람들이 길목을 막아서며 ‘쉽볼렛’이라는 단어를 말해보라고 시킨다. 제대로 못 하고 ‘십볼렛’이라고 하면 잡아서 죽였다. 그 수가 4만2천명이었다. ‘쌀’을 ‘살’이라 하면 죽이는 격이다.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말로 ‘15엔 50전’(주고엔 고주센)이란 말을 시켜 제대로 못 하면 조선인이라 하여 바로 살해했다. 발음이 생사를 갈랐다.

나는 가끔 태극기집회에 간다. 그곳엔 어떠한 머뭇거림도 찾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추겼고, 확신에 찬 1만명은 마치 한 사람 같았다. 그 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다 빨갱이였다. 언어는 퇴보하고 있었다. 막힌 하수구처럼 다른 말은 흐르지 못했다. 고향을 알면 빨갱이인지 알 수 있단다. 소득주도성장 때문에 나라를 망친 대통령은 빨갱이다. 북한에 돈을 제일 많이 갖다 바친 전임 대통령은 빨갱이다. 노란 리본 달고 다니는 놈들은 빨갱이다. 그래서 다 죽여야 한다. 빨갱이면 왜 죽여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먼저 죄인이라 불러놓고 죄목을 찾는다.

비통함이 없는 분노는 얼마나 위험한가. 망설임이 없는 적개심은 얼마나 맹목적인가. 거기, 나의 아버지들이 단어 하나를 부여잡고 막무가내로 앉아 있다.


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1. No Image notice by 바람의종 2006/09/16 by 바람의종
    Views 31821 

    ∥…………………………………………………………………… 목록

  2.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3. No Image notice by 風磬 2006/09/09 by 風磬
    Views 193304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4. No Image 27Apr
    by 바람의종
    2007/04/27 by 바람의종
    Views 14320 

    호래자식(후레자식)

  5. No Image 29May
    by 바람의종
    2010/05/29 by 바람의종
    Views 11282 

    호두까기 인형

  6. No Image 10Apr
    by 바람의종
    2008/04/10 by 바람의종
    Views 9384 

    호두과자

  7. No Image 29Sep
    by 바람의종
    2007/09/29 by 바람의종
    Views 8700 

    호남

  8. No Image 28Feb
    by 바람의종
    2010/02/28 by 바람의종
    Views 12394 

    호나우두(Ronaldo)와 호날두(Ronaldo)

  9. 호꼼마씸?

  10. No Image 17Aug
    by 바람의종
    2010/08/17 by 바람의종
    Views 10136 

    호구

  11. No Image 26Sep
    by 바람의종
    2007/09/26 by 바람의종
    Views 11035 

    호구

  12. No Image 28Sep
    by 바람의종
    2007/09/28 by 바람의종
    Views 8024 

    호구

  13. No Image 26Jan
    by 바람의종
    2008/01/26 by 바람의종
    Views 11035 

    형제자매

  14. No Image 14Jul
    by 風文
    2022/07/14 by 風文
    Views 752 

    형용모순, 언어의 퇴보

  15. No Image 23Sep
    by 바람의종
    2007/09/23 by 바람의종
    Views 12119 

    형극

  16. No Image 22Sep
    by 바람의종
    2007/09/22 by 바람의종
    Views 8796 

  17. No Image 02Jul
    by 바람의종
    2008/07/02 by 바람의종
    Views 7619 

    혈혈단신, 이판사판

  18. No Image 17Jul
    by 바람의종
    2010/07/17 by 바람의종
    Views 11928 

    혈혈단신

  19. No Image 24Dec
    by 바람의종
    2007/12/24 by 바람의종
    Views 7410 

    혈혈단신

  20. No Image 03Jun
    by 바람의종
    2008/06/03 by 바람의종
    Views 8705 

    혈구군과 갑비고차

  21. No Image 08Aug
    by 바람의종
    2008/08/08 by 바람의종
    Views 8150 

    현수막, 횡단막

  22. No Image 19Apr
    by 바람의종
    2012/04/19 by 바람의종
    Views 11471 

    현수막, 펼침막

  23. No Image 20Jun
    by 風文
    2022/06/20 by 風文
    Views 619 

    혁신의 의미, 말과 폭력

  24. No Image 03Aug
    by 바람의종
    2010/08/03 by 바람의종
    Views 10546 

    헷갈리는 받침

  25. No Image 09Jan
    by 風文
    2024/01/09 by 風文
    Views 631 

    헷갈리는 맞춤법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