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역 대신 ‘기윽’은 어떨까, 가르치기도 편한데
기역 대신 ‘기윽’은 어떨까, 가르치기도 편한데
마르고 닳도록 입고 다니던 청바지가 버스에 앉는데 찍 하고 찢어졌다. 천을 덧대어 오버로크해서 버텼으나, 오래 못 가 뒷무릎까지 찢어졌다. 아깝더라도 버릴 수밖에.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김수영)지만, 언젠가는 버려야 할 때가 온다. 한글 자음 이름도 그렇다. 한글 창제 후 백년쯤 지나 최세진은 어린이용 한자학습서 ‘훈몽자회’를 쓴다. ‘天’이란 한자에 ‘하늘 천’이라고 적어두면 자습하기 편하겠다 싶었다. 명민한 최세진은 이름만 배워도 그것이 첫소리와 끝소리에서 어떻게 발음이 되는지 알 수 있게 만들었다. ‘리을, 비읍’처럼 ‘이으’의 앞뒤에 ㄹ, ㅂ을 붙이면 첫소리와 끝소리를 연습할 수 있겠다. 그래서 ‘ㄹ’ 이름을 梨乙(리을), ‘ㅂ’ 이름을 非邑(비읍)이라고 지었다. 기발하고 참신하다.
그런데 처음부터 문제였다. ‘ㄱ’도 기윽이라 해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윽’이라는 한자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발음이 비슷한 役(역)을 써서 其役(기역)이라 했다. 이런 식으로 이름 붙인 게 ㄱ, ㄷ, ㅅ 3개다. ‘ㄷ’도 디읃으로 하고 싶지만, ‘읃’이란 한자가 있을 리 없지. 末(말)이란 한자에 동그라미를 치고 이건 뜻으로 읽으라고 해 놓았다. 옛 발음으로 ‘귿 말’이니, ‘디귿’ 되겠다. ‘ㅅ’도 時衣(시의)라 쓰고, 衣(의)에 동그라미를 쳤다. ‘옷 의’이니 시옷.
궁여지책이었다. 왜 ‘기역, 디귿, 시옷’인지 설명해 주는 선생도 드물었다. 외국인에게 가르칠 때도 이름은 슬쩍 넘어간다(그거 알려주다간 날 샌다). 남북이 함께 만드는 ‘겨레말큰사전’에는 ‘기윽, 디읃, 시읏’으로 통일했다. 어린이나 외국인에게 가르치기도 편하다. 바꿀 땐 바꿔야 한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 목록 | 바람의종 | 2006.09.16 | 45203 |
공지 |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 바람의종 | 2007.02.18 | 191653 |
공지 |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 風磬 | 2006.09.09 | 206872 |
3148 | 오염된 소통 | 風文 | 2022.01.12 | 1250 |
3147 |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IMF, 막고 품어라, 내 인감 좀 빌려주게 | 風文 | 2022.02.01 | 1250 |
3146 | 마녀사냥 | 風文 | 2022.01.13 | 1252 |
3145 | 멋지다 연진아, 멋지다 루카셴코 | 風文 | 2023.04.17 | 1252 |
3144 | 콩글리시 | 風文 | 2022.05.18 | 1253 |
3143 | 주권자의 외침 | 風文 | 2022.01.13 | 1254 |
3142 | ‘도와센터’ ‘몰던카’ | 風文 | 2024.01.16 | 1255 |
3141 | 공적인 말하기 | 風文 | 2021.12.01 | 1256 |
3140 | 김치 담그셨어요? | 風文 | 2024.02.08 | 1256 |
3139 | 성적이 수치스럽다고? | 風文 | 2023.11.10 | 1257 |
3138 | 한국어의 위상 | 風文 | 2022.05.11 | 1258 |
3137 | 헛스윙, 헛웃음, 헛기침의 쓸모 | 風文 | 2023.01.09 | 1258 |
3136 | 선정-지정 / 얼룩빼기 황소 | 風文 | 2020.05.15 | 1259 |
3135 | 깻잎 / 기림비 1 | 風文 | 2020.06.01 | 1259 |
3134 | 표준말의 기강, 의미와 신뢰 | 風文 | 2022.06.30 | 1264 |
3133 | ‘시끄러워!’, 직연 | 風文 | 2022.10.25 | 1266 |
3132 | 지식생산, 동의함 | 風文 | 2022.07.10 | 1271 |
3131 | 보편적 호칭, 번역 정본 | 風文 | 2022.05.26 | 1272 |
3130 | 일타강사, ‘일’의 의미 | 風文 | 2022.09.04 | 1274 |
3129 | 괄호, 소리 없는, 반격의 꿔바로우 | 風文 | 2022.08.03 | 1277 |
3128 | ‘거칠은 들판’ ‘낯설은 타향’ | 風文 | 2024.01.09 | 1283 |
3127 | 웰다잉 -> 품위사 | 風文 | 2023.09.02 | 12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