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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쓰는 왕자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생각과 취향은 어디에서 올까? 부질없는 욕심은 스스로 자라나는 걸까? 돈의 존재가 돈에 대한 생각을 부추기듯, 표준어의 존재는 표준어에 대한 열망을 부른다. 표준어 중심의 사회는 표준어를 추앙하게 만들었다. 사투리는 보존 대상일지는 몰라도, 욕망의 대상은 아니다. 사투리는 반격과 복권의 기회를 얻을까?

2년 전 포항의 독립출판인인 최현애씨는 여러 소수 언어로 <어린 왕자>를 번역하는 독일 출판사의 문을 두드려, ‘경상도 사투리판’ <애린 왕자>를 펴냈다. 그해 가을, 언어학자 심재홍씨는 ‘전라도 사투리판’ <에린 왕자>를 냈다. 지난해엔 제주에서 잡지를 발행하고 있는 이광진씨가 ‘제주도 사투리판’인 <두린 왕자>를 펴냈다.

이들 책은 결코 눈으로만 읽을 수 없다. 고유한 억양과 장단음을 섞어 소리 내어 읽게 된다. 비로소 말은 평평한 표준어에서 빠져나와 두툼한 질감을 갖고 출렁거린다. 정말 그런지 잠깐 읽어보련?

“니가 나를 질들이모 우리사 서로 필요하게 안 되나. 니는 내한테 이 시상에 하나뿌인기라. 내도 니한테 시상에 하나뿌인 존재가 될 끼고.”(경상도, <애린 왕자>)

“니가 날 질들이믄 말이여, 우덜은 서루가 서루헌티 필요허게 될 거 아닌가잉. 넌 나헌티 시상서 하나밲에 없게 되는 것이제. 난 너헌티 시상서 하나밲에 없게 되는 거고잉.”(전라도, <에린 왕자>)

“만약 느가 날 질들이민 그땐 울리는 서로가 필료허여지는 거라. 나신디 넌 이 싀상에서 단 호나인 거주. 너신디 난 이 싀상 단 호나뿐인 거곡.”(제주도, <두린 왕자>)

생각은 어디에서 올까? 다르게 말하면 다르게 생각한다.



얽히고설키다

일이나 관계, 감정 따위가 복잡하게 꼬여 있을 때 ‘얽히고설키다’란 말을 쓴다. 그런데 그 표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왜 ‘얼키고설키다’나 ‘얽히고섥히다’로 적지 않고 ‘얽히고설키다’로 쓰는 걸까? 같은 ‘키’ 소리가 반복되는데 앞의 것은 ‘히’로, 뒤의 것은 ‘키’로 적는다.

‘얽히고설키다’, 이 말의 표기엔 우리말 맞춤법의 원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알면 다른 웬만한 것들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소리대로 적는다는 것은 ‘구름, 하늘’처럼 우리말의 발음에 따라 그대로 표기하는 것이다. 어법에 맞게 적는 것은 ‘구르미, 하느리’로 소리 나는 말들을 ‘구름이, 하늘이’로 구분해서 적는 것이다. 이것은 ‘구름’과 ‘하늘’에 ‘이’가 결합해서 그 말들이 문장의 주어 역할을 한다는 것을 쉽게 나타내 준다. 만약 소리대로만 적는다면 ‘구름과, 구르미, 구르믈’처럼 같은 뜻을 나타내는 말이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적힐 것이다. 그러면 ‘구름과, 구름이, 구름을’로 적을 때처럼 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다. 이처럼 읽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같은 뜻을 지닌 말은 항상 같은 형태로 적는 것이 어법에 맞도록 하는 원칙이다.

‘얽히고설키다’에서 ‘얽히다’는 ‘얽다’에서 온 말이다. ‘이리저리 관련이 되게 하다’를 뜻하는 ‘얽다’에 ‘히’가 붙어서 된 말이므로 어법에 맞게 쓰는 원칙에 따라 ‘얽히다’로 쓴다. ‘설키다’는 ‘섥다’가 우리말에 따로 존재하지 않으므로 ‘섥히다’로 적을 이유가 없다. 따라야 할 어법이 없으므로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설키다’로 적는다. 그래서 ‘얽히고설키다’란 표기가 생겨난 것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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