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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유럽 중세도시'라는 신화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7> 유럽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나? ①

4. 자유로운 유럽 중세도시의 신화

  1. 유럽 중세도시에 대한 신화

  아름다운 유럽의 도시들

  한국 사람들이 유럽에 가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름다운 도시의 모습들일 것이다. 세월의 자취를 느낄 수 있는 붉은 기와지붕의 오랜 건물들, 좁은 골목길, 대로변의 웅장한 석조 공공건물, 거대한 고딕 성당, 기념물들이 즐비한 드넓은 광장과 노천 까페, 기하학적인 모양의 아름다운 정원들, 게다가 여유 있어 보이는 유럽인들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 있는 음악과 춤, 이런 것들을 연상하면 한번 지나쳐 온 유럽 도시를 돌이켜 보노라면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감돌 수밖에 없다.

  이런 유럽의 도시들을 온통 콘크리트 범벅에다가 아름답지도, 또 역사와 문화향기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우리의 도시들과 비교하면 저도 모르게 탄식과 함께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한국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한 번 유럽도시들을 구경하고 그 숨결을 느끼고 온 사람들은 유럽의 많은 도시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 유럽의 도시

  그러나 유럽도시의 매력은 이런 외면적인 모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도시가 그 나름의 독특한 정신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인데, 그것이 외면적인 것보다 아마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자유와 자본주의의 고향

  우선 도시는 유럽인의 자유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미 중세 시대에 유럽의 도시민들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왕이나 봉건영주와 싸워 자유를 확보했다. 그래서 도시는 자유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또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때에는 그 전통을 이은 파리 시민들이 절대왕정에 대항해 혁명을 일으켰고 민주주의를 확립했다. 그러니까 유럽 도시들은 이런 역사 발전의 생생한 현장인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의 중세도시는 자본주의의 고향이기도 하다. 도시는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이 모여들어 상공업이 번성함으로써 봉건제가 지배하는 주변의 농촌 지역과 전연 다른 곳이 되었다. 그래서 자본주의적 태도를 발전시킬 수 있었고 그것이 주위의 농촌으로 퍼져 나가며 근대 초에 와서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를 확립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유럽의 도시들은 인류의 문화적 자산 가운데에서도 보석과 같은 존재로 소중하게 간직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반면 중동이나 다른 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은 이와 전연 다르게 생각된다. 우중충하고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더러운 거리들, 그 위에 사는 거칠고 야만적인 사람들, 자유라고는 냄새도 맡아 보지 못한 억압과 착취의 고장, 종교적 광신과 문맹이 지배하는 낯선 땅이다. 이 정도가 되면 이런 도시들을 거니는 것조차 역겹게 느껴질 것이다.

  말하자면 유럽의 도시들은 비유럽의 이런 도시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도시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유럽문명의 기초로서 오늘날의 우월한 서양문명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나 인권, 시민적 자유와 같은 서양의 정치적, 시민적 가치가 도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적인 면은 사실 서양인들이 계속 주장하는 것이고 또 우리가 계속 그렇게 배워 온 것들이다. 이런 이야기는 과연 어느 정도나 사실과 부합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실일까. 신화일까.

  2. 중세도시는 자유로웠는가?

  11세기부터 발전한 중세도시


  그러면 서양 사람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중세도시는 언제부터 나타나는가? 로마는 '도시의 국가'라고 부를 정도로 로마시대에는 도시가 발전했었다. 그러나 5세기에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며 점차 그 활력을 잃게 된다.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정치적 불안정이 계속되며 경제가 위축됐기 때문이다.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은 유럽 경제에 더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이슬람 세력이 동부 지중해와 아프리카 북부 해안뿐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까지 지배하며 지중해의 해상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던 유럽의 경제활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9세기에는 많은 도시들이 이름만 남기고 사라지거나 살아남는다 해도 그 규모가 크게 작아진다.

  유럽에서 도시가 다시 발전하게 된 것은 11세기에 들어와서이다. 오랜 정체 끝에 11세기에 와서 인구가 늘고 농업이 발전하기 때문이다. 이에 상업도 다시 활기를 띠며 도시도 성장하게 된다. 이 시기에 이슬람 세력이 약화되며 지중해 무역이 되살아난 것도 유럽 안에서 장거리 교역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축소되었던 과거의 도시들이 다시 확대되고, 왕이나 영주들이 사는 성의 부근, 또는 중요한 교역 중심지에 도시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각종 상인들이 모여들고 여기에 신발, 옷가지, 그릇, 가구 등 각종 생활용품이나 무기 등을 만드는 수공업자들, 또 양조업자, 제빵공 등 다른 많은 직업의 사람들이 합쳐지며 도시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도시가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았으나 한 편에서는 왕이나 영주들에 의해 새로 건설된 도시들도 많다. 그것은 도시로부터 각종 세금이나 점포세, 거래세 등 여러 가지 수입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도시들은 어떻게 자유를 얻었을까.
  





▲ 중세 프랑스의 한 상점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가져 온다'

  일반적인 설명에 의하면 이렇게 만들어진 많은 도시들에서는 도시민들이 힘을 합쳐 왕이나 봉건영주와 싸우거나, 또는 돈을 주고 자유를 얻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시민의 숫자가 늘어나고 이들의 힘이 커지며 왕이나 영주들의 간섭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각 도시는 나름의 행정기구를 갖고 재판소도 운영하며 자치를 하게 된다.

  도시에서는 보통 12인으로 구성되는 위원회가 도시 안의 여러 업무에 대해 최종 결정을 하고 그들이 대표로 선출하는 시장이 최고의 책임을 진다. 또 살인 같은 중범죄는 다룰 수 없으나 사기나 절도 같은 사소한 범죄들은 도시 재판소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도시가 이렇게 자율성을 가지므로 그것은 주변의 농촌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곳이 된다.

  농촌 지역에는 봉건적 예속과 착취가 있지만 도시에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촌에서 도망쳐 온 농노라 할지라도 도시로 들어와 일정기간이 지나면 시민으로서 자유로운 신분이 될 수 있었다.

  '도시의 공기가 자유를 만든다'는 독일 속담은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중세도시에서 발전한 시민들의 자유가 근대에 들어와 유럽에서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가 발전하는 기틀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나 사실은 상당 부분 잘못된 것이다. 중세도시를 그럴듯하게 미화하려 한 근대 서양학자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이런 식의 해석을 했을까.

  앙리 피렌느의 <중세도시>

  유럽의 중세도시를 '도시의 자유' 라는 면에서 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부터이다. 프랑스 학자들이 프랑스 혁명의 기원을 중세도시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1789년에 파리 시민들이 도시 자치체인 코뮌을 만들어 루이 16세의 왕정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한 시도를 바로 중세도시의 전통과 연결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학문적으로 잘 뒷받침한 것은 20세기 초에 널리 활동한 벨기에의 중세사학자 앙리 피렌느이다. 그가 1925년에 쓴 <중세도시>라는 책은 그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는 중세도시의 상업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상업적이고 자유로운 도시와, 농업적이고 봉건적인 틀에 묶여 부자유스런 주변의 농촌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 도시와 농촌의 성격이 확연히 달랐다는 것이다. 이는 중세도시가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 앙리 피렌느 (Henri Pirenne, 1862~1935, 벨기에의 역사학자)

  피렌느는 도시의 발전에서 중요한 사실은 '부르주아지'라고 불리는 도시민들이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르주아지(Bourgeoise)란 불어로서 말 그대로 도시(불어의 bourg, 독일어의 burg, 영어의 borough: 이것의 어원은 군사적 요새이다)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나 피렌느가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이들이 신분적으로 농민들과는 달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13세기말의 도시민들(부르주아지), 파리국립박물관

  





▲ 중세의 농노들

  중세 시대의 유럽 농민들 가운데에는 자유농이나, 노예, 품팔이꾼도 있으나 일반적인 형태는 영주가 다스리는 장원에서 사는 농노들이다. 농노는 땅의 소유권을 가질 수는 없으나 다른 농노들과 공평하게 분배받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그것을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이를 소유가 아닌 '보유(保有)'라 한다. 따라서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 받을 수 있었다.

  그 대신 영주에게 묶여 살았다. 영주가 직접 관할하는 직영지에서 일주일에 사나흘, 심지어는 엿새를 꼬박 일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영주의 허락 없이는 장원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 갈 수도 없었다. 영주에게는 농사 지을 노동력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농노의 딸이 다른 장원으로 시집가는 경우 영주에게 허락 받아야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영주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몸을 구속했을 뿐 아니라(이것을 인신적(人身的) 지배라고 한다) 재판권이나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 여러 가지 세금도 내야 했고 성을 쌓는 등 필요할 때에는 노동력도 제공해야 했다. 따라서 농노들은 신분이 높은 귀족인 영주에게 예속되어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피렌느는 농노들의 이런 상황에 비추어 영주에게 묶여 있지 않은 도시민들은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여러 봉건적 관할권에서 벗어나게 해줄 자신만의 도시법과 재판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집이나 토지를 소유할 수도 있고 그것을 마음대로 매매하고 또 자손에게 상속시킬 수도 있었다. 이런 점에서 도시는 봉건적 질서에 얽매인 주변의 농촌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시란 왕이나 영주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자율적인 공동체인 셈이다.

  막스 베버의 <도시>

  피렌느의 이런 생각을 받아 들여 그것을 더 정교한 이론으로 꾸민 인물이 막스 베버이다. 그도 피렌느와 마찬가지로 도시는 정치나 행정적인 기능만을 가져서는 안 되고 상업적인 성격이 주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유럽 중세도시의 특징으로 들고 있는 것은 다섯 가지이다. 우선 도시에는 성벽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변의 농촌과 분리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시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상업적인 성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는 도시만의 법과 그것을 가지고 재판을 할 도시 재판소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왕이나 영주의 법적 관할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는 도시의 행정을 담당할 조직이 있어야 한다. 도시의 자율성을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는 도시 대표를 선출할 때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 성벽에 둘러싸인 중세 남프랑스 한 도시의 모습

  그러니까 베버는 상업적인 성격을 가져야 하고 자치를 함으로써 자율성을 가져야 도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베버도 중국을 포함하는 동양의 도시들이 유럽의 도시보다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양의 도시들은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이런 도시의 중요한 요소들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진짜가 아닌 '가짜' 도시라고 생각했다.

  중국의 거대 도시들은 경제발전에 따른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행정이나 군사적 필요에 의해 왕이나 지배계급의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자율성이 허용될 수 없었으므로 크기는 하되 도시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20세기 후반의 서양 역사가들에게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래서 프랑스의 페르낭 브로델은 1995년에 쓴 <문명의 역사>라는 책에서 '13-14세기에 지어진 서양 도시의 석조성벽은 독립과 자유를 향한 의식적 노력의 외적인 상징'이며 '도시는 결코 꺼지지 않는 엔진이었다. 그것이 유럽의 첫 진보를 이끌었고 자유로 보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1990년대에조차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 것은 피렌느와 베버가 만든 중세도시에 대한 신화가 아직도 잘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유럽 중세도시들의 실제 모습은 어땠을까. 한 번 살펴보자.



/강철구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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