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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속 신선 이야기 - 민경환
 



   11. 전생의 비밀

  도장에서 수련하는 사람들, 특히 도문에 입문하여 도를 펼치는 일을 하고 있는 실무진들의 경우엔 전생이라든가 사후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아니,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정도로 어쩌면 그건 종교적인 신앙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없다의 문제를 떠나 수련을 하여 어느 단계 이상에 오르면 스스로 자신의 전생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눈에 보이고 체험되는 현상을 있다 없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런 이유로 전생이 있다 없다, 사후세계가 있다 없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도장에서 아예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험도 못한 상태에서 이러나 저러니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뿐더러, 믿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이야기들은 자칫 선입견으로 작용해 정작 그러한 현상들을 경험하고 보는 단계에 이르면 헤아릴 수 없는 마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전생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공연한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을 만나면, 말싸움하는 것이 귀찮아서 항상 이렇게 말하곤 한다.

  "수련해 보세요. 도계에 올라가 보면 알게 됩니다."
  소주천 수련을 할 때의 일이다. 이것저것 구상해 놓은 책은 많은데, 하나도 진척이 되질 않았다. 내심 고민하며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라는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댈 때 였는데, 한당 선생님이 넌지시 부르신다.
  "글 잘돼?"
  "그냥... 잘 안돼요. 워낙에 능력이 없다 보니까..."
  "연습 삼아 시를 한 번 써보지 그래?"
  "시를요?"
  "일사의 전생 중에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낙이었을 때가 있었는데, 빨래하면서 시를 지어 읊곤 했었어. 지금 그 전생기운이 붙어 있으니까 되건 안되건 시를 지어 버릇하면 글쓰는데 도움이 될 거야."

  '하필이면 웬 빨래하는 아낙?'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다. 전생에 왕후장상이나 뛰어난 인물은 아닐지언정 시냇가에서 빨래하는 아낙이라니...하다 못해 신사임당도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것도 있었어. 큰 도서관 같은 곳인데, 세상의 모든 정보가 다 모아지면 그곳의 관장이었던 일사가 가장 먼저 그 정보를 접하고 이해를 하곤 했지. 그래서, 그 기운의 영향으로 무슨 이야기를 들으면 남보다  이해가 빠르고 정리가 잘되는 거야."
  "아... 그런 게 있군요(음... 좀 나아지는군)."
  "또, 각국의 산해진미를 다 먹어  보아서 음식에 대한 조예가 깊지. 그래서 남들보다 간을 잘 봐."
  "네에..."

  내 전생이 무엇일까 궁금해한 적은 있었지만, 수련 중에 무슨 상이 보여도(전생이라 짐작되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라 그냥 묻어두곤 했었다. 생각해보자. 종교적인 문제 등으로 사후세계는 인정하되 전생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후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는 이야기의 반증이 된다. 이생은 찰나이며 도를 닦는다는 것은 지금껏 반복적으로 살아온 수많은 영들의 과정을 순식간에 역으로 거치면서 근본적으로 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생 이전에 그 전생이 있으며 이생이후에는 내생이 있다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윤회는 있는가? 당연하다. 윤회는 있다. 윤회란 자신이 처음으로 창조된 태초의 자리로부터 파생되어 자신이 출발한 원점을 찾아 되돌아갈 때까지 필연적으로 거치게되는 하나의 순환 사이클이다. 윤회의 끝은 도통, 성불, 구원에 있는 것이다. 윤회가 하나의 순환 원리로 존재하는 이유는 완성에 있다. 아기가 태어나서 사회적인 교육을 받고 자신의 꿈을 한 생에 이루듯이, 나라는 존재는 이 지구상에 빛으로부터 파생되어 윤회를 거쳐 하나하나 완성을 위한 우주의 섭리를 공부해 나가다가 도통을 통해 완성이 되고 윤회의 사슬을 끊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윤회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전생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전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당사자가 전생을 믿건 안 믿건 간에 전생은 존재했고, 현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야. 바로 그 점이 중요하지. 선도 수련자의 입장에서는 사실 전생이 있다 없다라는 정의를 내린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야. 전생을 믿지 않았던 이라도 수련의 경지가 어느 선까지 올라가게 되면 자신의 전생을 확연히 보고 알 수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아쉽게도 '전생이 없다'라고 말하는 이에게 '전생이 있다'라고 증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마치 유럽이 어디 있는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유럽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같은 거지. '그런 것이 어디 있어?'라고 비웃어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현명한 자라면 유럽에 대한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후에 유럽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여 직접 가보고 확인하려 할거야."
  "전생에 지은 죄가 현생에도 영향을 미치는 건가요?"
  "흔히 팔자가 사나운 사람들이 하소연을 할 때,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고 얘기하곤 하지. 그러나, 현생의 팔자가 전생의 죄와 관련이  있는 건 아냐.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전생에 지은 죄는 바로 전생의 사후에 탕감이 되기 때문이지. 물론, 전생에 지은 죄의 찌꺼기는 남아 있어. 이게 바로 원죄가 되는 거야. 현생에 있어서는 전생의 죄가 관련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전생의 굵직한 기억들이 무의식의 심연에 남아 영향을 미치게 되지. 간단히 예를 들어볼까? 전생에 내가 살인을 했다고 해도 분명 현생의 죄는 아니야. 그러나, 전생에 내가 살인을 했다면 당연히 마음이 아프지. 그러면서 살인이 안 좋은 것이란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거든? 그것이 무의식에 굵은 기억으로 남아 현생에서는 욱하는 성격 때문에 누굴 죽이고 싶어도 그걸 알기 때문에 살인을 하지 않게 되는 거야. 즉, 전생의 기억은 윤회의 과정으로 보았을 때는 완성을 위한 좋은 교육자료가 되는 것이거든."

  너무나도 오랜 시간, 방대한 내용의 이야기가 오고 갔기에  모든 이야기를 다 옮길 수가 없다. 그래서 조금 내용이 딱딱하긴 하지만, 선생님의 설명을 나름대로 정리해 두었던 것과 KBS에서 취재 나와 질문했던 내용에  대한 답변을 간추려서 질의 문답식으로 꾸며보았다. 전생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되기 바란다.

  1. 전생과 현생의 연관성은?

  이와 같이 전생을 보게 되면, 그 당시(전생에서)공부했던 모든 것들을 알게 된다. 사람이 많은 세월을 통해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것들을 자신의 전생 경험을 일순간 보게 됨으로써, 많은 지혜와 깨달음을 얻게 되고 마음의 경지가 높아지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태초에 내가 어디에서 왔는가를 알아가게 되는 과정이며, 수련자가 수련을 하면서 반드시 거쳐가게 되는 이정표와 같은 과정이다. 있다 없다의 정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수련자는 수련과정 중에 전생을 확연히 눈으로 보게 되면 믿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먼저 가봤으니까 후학들이 그대로 뒤따라와서 그 길을  직접 가서 보고, 자기 수련에 도움이 될 수 있게끔 할뿐이다. 자신의 전생을 보면 타인의 전생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수련자가 보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을 때의 일이다.  자신이 보려고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가령, 호흡수련을 하는 회원들은 몸이 어디가 안 좋거나 집안이 뒤숭숭하거나 혹은 마음에 모순된 구석이 있다면 왜 그런지 그 원인을 찾아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다 보면 전생에서 기인된 것들이 있곤 하다. 그래서 전생이 이러이러하다고 알려주게 되면, 본인은 전생을 모른다 하더라도 듣는 것만으로 뇌세포에 기억되어 있는 전생이 떠올라 '그렇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것은 본인이 전생에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마음을 깨우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서 편협했던 마음, 잘못된 습관 등이 바뀌게 된다. 일반인들도 전생이 있다 없다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전생은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어떠한 쪽에 소질이 있다면 그 소질이 어디서 왔는가를 보아야 한다. 누구든지 부모가 가지지 않은 남다른 소질이 있을 것이다. 가령 누구는 공을 잘 차고, 누구는 피아노를 잘 치고... 무언가 똑같은 시간을 투자했을 때 남들보다 월등히 잘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전에 언젠가 해보았기 때문에 지금은 쉬운 것이다. 그래서 도를 지도할 때는 전생에 했던 부분으로 많이 유도를 해주고,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해보라고 권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굵직한 기억 이외에 전생은 현실적으로도 밀접한 영향을 끼치곤  하는데, 그것이 바로 전생영이다. 전생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바로 앞의 전생이 있다면 그 이전의 전생도 있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전생 중에서 어느 전생이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에 따라서,  이것이 나의 운이 된다. 예를 들어 전생에 학자였던 영이 있고, 놀기 좋아하는 영이 있다고 하자. 이 중에 놀기 좋아하는 영이 지금 나에게 붙어서 10년간 따라 다니는 운이라면 나는 계속  놀기만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전생에 학자였던 영이 3년 전부터 나를 따라 다니는 운이라면 그때부터는 계속 책만 보게 된다. 공부만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전생은 일생운과도 연관이 있다. 따라서 사람의  성격이란 것은 일생동안 똑같은 것이 아니다. 기복이 있어서 어느 시기에 가면 바뀌게 된다. 불같이 욱하던 성격이 어느 날 갑자기 성인군자처럼 되고, 양순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망나니가 되기도 한다. 즉, 전생영이 어떻게 붙어 있느냐에 따라 성격이 형성되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과 다음에 올 전생영 등이 살아가는 운에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때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 운대로 그냥 흘러가게 된다. 이럴 때 장점만 갖추게 되면 그보다 좋은 것은 없다. 예를 들어 학자인 전생영이 붙어 있다가 일년 후에 놀기 좋아하는 한량으로 바뀐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경우, 학자의 고집은 뜻을 이루고 발전시켜 나아가는데 쓰게 되고, 한량의 여유로움은 평상시 대인관계에 잘 활용하면 좋다. 만약 수련을 통해 마음공부를 하지 않으면, 그 좋고 나쁜 것이 다 기본바탕으로 형성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좋은 족으로 자기 발전을  하지 못하고 전생영의 성격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청소년들이 공부만  한다는 것과 공부는 안하고 놀기만 좋아한다는 것을 탓할 수 없는 문제이다. 만약에 전생에 놀기 좋아했던  영이 하필이면 고등학교 시기에 붙어 버렸다면 공부를  할 수가 없다. 놀러  다니는 것이 너무 재미있고  그쪽으로만 머리가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그 시기에 학자영이  붙는다면 다른 것이 재미없고 공부하는 것만 재미가 있어서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다. 그러므로 누구를 탓할 수가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고등학교 때에 공부를 잘해야  운이 풀리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즉 본질적으로는 탓할 수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악운으로 작용하는 경우라 하겠다. 그래서 전생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그만큼 많은 득이 되는 것이다. 내가  전생에 어떤 것을 하면서 어떤 한을 품고 살았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한이 풀어져 버린다. 내가 전생에 편협한 이런 안 좋은 면이 있었으니 이젠 하지 말아야겠다... 라고 성격이 일취월장 바뀌게 되는 것이다. 좁쌀 같은 마음이 커지는 것은 물론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전생을 아는 것은 의미가 잇다. 전생은 현생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 사람이 동물로 환생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나는 전생에 소였다', '나는 곰이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말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욕을 하는 행위와 같다. 사람은 곰이 될 수 없고 곰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곰은 새끼를 낳아도 곰 새끼를 낳고 사람은 자식을 낳아도 사람을 낳는다. 원숭이가 사람을 낳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법도다. 모든 것이 법도에 어긋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을 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겠는가? 사람들이 전생에 소였다, 돼지였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그런 감정의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에게 거짓말하기를 좋아해서  이야기를 꾸며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이상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삶이라는 건 전생에서 현생, 내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엔 하나의 제도가 있다. 우리가 현대 사회에서  도둑질을 했다면, 법원에 가서 판사들에게 판결을  받게 된다. 징역이 선고되고 나면 가는 곳이 바로 교도소다. 교도소에 가면 계속 거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고 이감이 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죽으면 도계로 가게된다.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영계도 그 중 한 부분이다. 그곳에서도 그 나름대로의 법도를 가지고 살게되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죄와 벌을 가리기 시작하는데 죄지은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서 제도로 만들어 놓은 형벌이 있다. 즉, 나중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전에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 기회란 지상 사람들에게 보시를 하며 깨우칠 수 있는 기회다. 이 때의 영은 빛이다. 모든 만물은 빛으로 되어 있다. 빛의 층에 따라 만물이 존재하게 되는데 영도 빛이기 때문에  주변 물건들, 예를 들어 방석이나 병 같은 곳에도 집어넣어 가둘 수가 있다. 못된 영들을 이런 곳에 집어넣어 버리면 거기서 꼼짝도 못하고 갇혀 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동물 속에 집어넣어 버리는 것이다. 곰이나 멧돼지 속에 집어넣으면 동물처럼 살아가면서 고행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하여 다시는 죄를 지어선 안되겠다는 자연의 이치를 몸 속에서 깨닫기 시작한다.

  만약 동물이 수명을 다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동물들은 수명이 있기 때문에, 영이 갇혀 있던 그 동물이 죽고 나면 영은 다른 동물한테로 다시 이동을 하게 된다. 즉, 감옥 이동을 하는 것이다. 동물이 바로 감옥 역할을 하게 된다. 감옥이동을 하는 순서를 보면 처음에는 뱀 같은 야생에서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가축으로 오게 된다. 소, 닭, 돼지 같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이렇게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보시하고 다시 도계나 영계로 올라간 다음 다시 사람으로 환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도살장에 가서 보면, 마지막 순간에 눈물을 흘리는 동물이나, 눈동자에서 마치 사람과 같은 감정이 느껴지는 동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그 마지막 순간에 갇혀 있던 영이 나가면서 느끼는 그 감정이  동물의 눈에 비추어 반영되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가끔 길을 가다가 동물들을 보면 그 안에 조선시대 사람부터 외국인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형량이 얼마 남았는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역으로 그 동물의 남은 수명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이 죄를 짓고 죽었다고 해서 동물로 환생하여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자신의 죄를 탕감하기 위해 사람의 영이 일시적으로 동물의 몸 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동물이 되는 것과 동물이라는  감옥으로 잠시 들어가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3. 전생의 의의는 무엇인가?

  전생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꼭 필요한 과정일까? 그렇다. 내가 전생에 60년을 살았다면 전생을 알게 됨으로써 60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즉, 60년을 살아야 깨우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다 알게 되는 것이다. 지금 30세라면 그 사람은 90세의 정신과 경험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많은 학문을 깨우치는데 원동력이 되며 좋은  인격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전생의 그런 일을 모른다면 욱하는 성격에 기분 나쁘다고 살인까지도 저지를 수가 있다. 수련자가 자신의 전생을 볼 때는 눈물도 많이 흘린다. 전생을 보면서 웃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잃어버렸던 과거와 전생을 알게 되면서 눈물로 한을 씻어 내리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이생까지 살아왔구나...'를 알고 나면 60평생 전생이 바로 어제의 일이 된다. 이렇게 전생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교육을 실질적으로 많이 체험을 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을 여유롭고 너그럽게 쓰는 데에 중요한 열쇠가 된다. 흔히 사람들이 농담으로 '나는 전생에 왕이었나봐, 공주였을 거야...'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만약 내가 전생에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내가 전생에 왕이었는데  현생에선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전생을 모르는 사람이다. 전생을 보는 순간,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점을 많이 깨우치게 된다. 그리고 깨우치게  됨으로써 자신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왕이었다고 해서 교만해질 사람은 거의 드물다. 왜냐하면 스스로  본인의 전생을 확연히 알 정도가  되면, 당연히 현실과 과거를 구분할 줄 알기 때문이다.

  주위를 보면 전생이라는 말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전생을  빙자해서 결혼을 하는 등의 행위이다. 전생에 우리가 부부였으니 결혼해야 한다는 말은 총각이라면 애교로 봐줄 수 있다. 멋진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나 부인이 있는 사람이 전생을 빙자하여 현생의 부인과 이혼하고, 젊고 어여쁜 여자와 다시 결혼을 한다면 이건 정말로 잘못된 것이다. 그야말로 전생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전생은 그저 전생일 뿐이다. 전생에 왕이었으면 무얼 하겠는가. 현생이 중요한 것이다. 전생은 자기에게 이롭게 깨달음을 얻는 도구에 불과하다. 전생을 보고 난 후 전생의 고난을 그대로 쥐고 현생의 자기와 안 좋게 비교해서 살아가는 건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 때문에 우연한 계기로 전생을 알게 되는 경우와, 본인이 직접 선도수련을 통해 스스로 전생을 안다는 것은 정말 큰 차이가 있다. 복숭아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복숭아가 맛이 있다며 그림을 보여주는 것과, 직접 먹어보는 것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 수련을 통해 전생을 아는 것만이 가장 올바른 방법이다. 간혹 회원들 중에서 전생을 알고 싶어 물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도장에서는 도움이 될 전생을 이야기할 뿐이지, 해가 될 전생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도 공부하는 사람의 전생이 왕이었다고 해도 그런 것은 이야기 하지 않는다. 때론 당신은 거지였다고 거짓말도 한다. 이것이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이다. 하지만 그 사람이 공부를 꾸준히 해서 스스로 전생을 볼 때가 되면, 그땐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 선도인들의 세계다.

  근래 들어 사람들이 더더욱 전생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과학 문명이 발달하고 생활이 풍요로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이 발달한 만큼 정신적으로 빈곤이 나타나고, 그 빈곤을 메우기 위해 정신적인 면에 관심을 가지고 싶어한다. 지금 같은 좋은 세상이 어디 있을까? 세상이 좋아지니까 삶의 욕심도 커지는 것이다. 사람은 욕심 때문에 살아간다.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에 그 에너지로 살아가는 것이다. 옛날 노인들을 보면 삶의 즐거움이 그다지 없었다. 그래서 늘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러나 요즘의 노인들은 그런 이야길 하지 않는다. '이 좋은 세상에 왜 죽느냐'고 한다. 현대 사회는 그만큼 문명이 발발해 살기 편하고 좋은 세상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영적인 면, 장수하는 쪽으로 관심이 쏠리고 그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어진다. 그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전생이 있다면 내생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결국은 내생이 궁금해서 전생에 관심을 갖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전생이 있다면 내생에 있기에 삶의 위안을 거기서 삼게 된다. 호기심은 호기심대로 늘어만 가고... 이것이 시대의 흐름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전생을 볼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는데 왜 저렇게 방황을 하는 것일까? 전생은 하나의 정신적인 기운이다. 시간대로 치면 과거에 있었던 기억이다. 그 기억은 우주공간에 널려 있다. 컴퓨터의 하드웨어에 정보가 저장되어 있듯이, 우주공간의 별들이 하드웨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살아왔던 삶들이 우주공간의 별들에, 운석들에 보이지 않는 시스템으로 입력되어 있다. 그걸 꺼내보면 된다. 컴퓨터를 구동시켜서 하드웨어 속의 정보를 꺼내 보듯이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워가 있어야 한다. 내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힘의 에너지는 바로 빛이다. 그 빛이 물질화가 되면 색이고 그 색이 유형화하여 감각화되는 것이 기다. 일단 기를 터득해 단전에 기가 쌓이고 그 기가 색과 빛으로 화하는 단계에 가서 정신이 밝아지게 되면 내 몸에 엄청난 파워가 생긴다. 분위기라는 말이 있다. 나눌 '분(分)'자를 써보자. 기가 나뉘어지는  것이 분위기이고 그것이 운기다. 경락을 뚫는  운기. 이것이 능수능란해지면 우주의 에너지도 내가 마음대로 끌어당겨 조절할 수가 있다. 그때에 자기의 전생과  내생도 보고 다른 이의 운명과 숙명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방법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법을  찾지 않고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한다. 노력없이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정말로 전생에  관심이 있고 참으로 전생을 알고 싶어한다면, 스스로 지금 하고 있는 호흡을 조금 더 조절하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길이  있다. 전생은 자신의 것이다. 자신 것을 보아야  남의 것도 보인다. 자기 전생을 알려면 자기 자신이 열심히 해야 한다. 남하고 비교할 게 못된다.

  전생은 이처럼 종교를 떠나서 자신, 가족, 사회를 밝아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전생에 했던 나쁜 습관의 해독을 알아 현생에 적용하게  되면 주위가 밝아진다. 전생을 안다는 것은 또 다른 자기 내면을 아는 것이다. 전생을 알고 싶으면 수련을 해야 한다. 기도하거나 빈다고  해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다 꿈에 나오기도 하고 최면을 통해  끄집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게 다는 아닌 것이다. 자유롭게 전생을 보려면 어느 경지까지는 가야  한다. 그 경지까지 간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군자 같은 사람들이다. 전생에 관심이 있는 많은 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전생을 생각할 때, 단순한 호기심으로만 보지 말고 자신의 완성을 위한 도구로써 전생을 잘 알아 스스로를 진실로 살찌우고자 했으면 하는  것이다. 선도수련을 통해 도인의 길을 걸으며  그 과정속에서 자신을 찾기 바란다. 그  간단한 것도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전생이 있다  없다를 논하지 말라. 그것은 어리석고 무익한 일이다.

  4. 전생에 관한 부연설명...

  나는 사실, 이러한 부연설명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중에 의문을 갖는 이들이 있어 이 기회에 밝히는 것이다. 흔히들 갖는 의문 중에 전생과 인구를 연관시켜 트집을 잡는 이들이 있다. 즉, 전생이 있다면 인구의 증가는 어떻게 가능하냐는 이야기다. 물론 인구는 늘어 왔지만, 어느 정도 이상 되면 인구는 더 이상 늘지 않는다. 인간의 수도 하늘에서 조절을 한다. 지구권에 맞는 영의 수는  정해져 있는 것이다. 지금 지구상에 인구가 50억이 있다면 천상에도 3, 40억이 존재하고 있다. 이들이 계속 순환을 함으로써 인구는 어느 한도 이상은 늘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구나 전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생이 없는 이들도 꽤 많다. 사람 몸을 특별한 이유에서 처음 받고 내려온 경우엔 전생이 없다. 언젠가 전생과 관련된 드라마가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부연설명을 하는 김에 하나 더 짚고 넘어가자면, 보통 죽어서 다시 환생하기까지는 300~400년이 지나야 한다. 최대한 빨리 오는 경우라도 100년 이내에 환생하는 일은 없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죽은 아버지가 자식으로 환생한다거나 죽은 애인이 주변 인물로 다시 태어나거나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에 불가하다.


  나는 이러한 선생님의 말씀을 들은 이후 전생에 대한 아무런 호기심이나 궁금함도 갖지 않게 되었다. 짧긴 하지만,  전생에 대해 궁금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해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또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아무튼 전생 때문에 남들보다  간을 잘 본다는 선생님의 말씀 이후, 내  별명은 한동안 '민간'이 되었다(속명인 민경환의 '민'자에 간을 볼 때의 '간'을 합성한 말임). 지금도 도장에서 김장을 하게  되면 필히 내가 맛을 보곤 한다. 왜냐?  '민간'이기 때문에... 아,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있다. 전생과  관련된 것이기에 잠시 짚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도장 원로 중에 현재 양신수련을 하고 있는 원계 김복규 회원이 있다.  이분이 워낙에 박학다식한 분인지라 나는  이분을 볼 때마다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분의 집에 놀러가서 차와 조청을 먹으며 다담을 나눌 때의 일이다.

  "일사! 여자 신선들이 신발을 신었을 거 같아, 안 신었을 거 같아?"

  갑자기 선생님이  물으신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신발을  신은 여선(女仙)은 도무지 어울리지가 않는다.

  "안 신었을 것 같은데요?"
  "맞았어... 전생의 기억이 남아 있는 모양이네?"

  선생님은 여흥으로 농담 삼아 하신 말씀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로 인해 내 전생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해야 했다. 전생의 기억? 그렇다면 내가 전생에 여자였거나, 아니면 원신(원신이란 태초의 나의 모습, 즉 전생을 거슬러 올라가서 전생이 없는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나의 본체를 말한다. 수련자는 석문호흡 수련을 통해서 이 원신과 최초의  신인합일을 이루게 된다)이 여자였단 말인가? 아닌게 아니라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앉는 자세도  양반자세보다는 여자들처럼 옆으로 다리를 모으거나, 무릎을  세우는 자세가 편안하다. 게다가 눈물이 많은 성격이라서 어려서부터 가족들과 슬픈 영화를 보면 아버님과 형은 멀뚱멀뚱 눈을 비비고 있을 때, 어머님과 나만 눈물을 글썽이며 울고 있을 정도였다. 가만  있어보자. 나는 현생에 남자인데, 내 원신이 여자였다면... 그렇다면 나는 여자와 신인합일을 하는 건가? 그럼, 성별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도장 사람들은 어이없다고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심각했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선생님께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왜?"
  "다름이 아니고요..."
  "..."
  "저기..."
  "무슨 얘긴데?"
  "제 원신이 여자인가요?"
  "무슨 소리야?"
  "예전에 선생님이  원계 집에서... 이러쿵저러쿵...  게다가 저는 앉는  것도 그렇고, 어쩌구저쩌구..."
  "아닌데? 일사 원신은 수염난 할아버지인데?"
  "감사합니다!"

  사실은 감사할 거 하나도 없는데(?) 감사하다고 외치고는 자리를 나왔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선생님을 통해  막상 원신이 남자임이 확인되자, 원신이 여자인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래도 나는 도공부를 제대로 할 재목은 아닌 모양이다. 게다가  선생님이 말씀해주신 전생 이야기도 그렇다. 그것이 못난 제자의 공부를 위해 일부러 해주신 말씀인지, 실제로 전생이 그러한지 선생님  외에는 모르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께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 예전에 이런 전생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는데... 이러쿵저러쿵..."
  "그래? 난 기억에 없는데?"

  선생님은 그저 미소를 지으실 뿐 더 이상 말이 없으시다. 하루 이틀 겪는 선생님이 아닌지라, 뻔히 알면서도 미혹에 빠진 미련한 제자는 무엇이든  궁금하면 선생님께 매달리게 된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둘을 알지는 못할 망정, 무어 그리 궁금한 게  많으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아는 게 아니라 열을 안다. 문제는 그 하나를 알기까지 힘이 들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남들이 스물을 알 시간에 나는 하나를 끙끙대고 앉아 있으니, 결국은 남보다 열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이 우둔함은 언제쯤이나  고쳐질까? 다시 한 번 생각해봐도  나는 도 공부를 제대로 할 재목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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