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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2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잊을 수 없는 사람

     거절할 수 없는 것 - 이외옥

  드디어 제가 첫아들을 낳고 보란 듯이 그이에게 아이를 보였을 때 아이를 바라보는 그이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아빠로서의 뿌듯한 기쁨과 함께 당장 닥친 돈 걱정 때문이었지요. 아니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지요. 가장으로서, 아빠로서의 책임과, 스스로 무능하다고 자신을 학대하는 비탄의 눈물을 저는 그때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으료보험 카드가 없어(지금은 전국민이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할인 받을 수도 없는 병원비 때문에 그이는 거리를 해메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흘러 퇴원날이 되었지요. 그이는 아침에 잠깐 얼굴을 비치고 나서 열한 시가 되어도 열두 시가 되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그 초조함과 불안한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두 시간 가까이 되어서야 상기된 얼굴의 그가 들어왔습니다. 돈을 빌려 주겠다던 친구에게 돈이 안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그이는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것을 겨우 추슬러 혹시 하고 다른 침구를 찾아갔답니다. 그런데그도 형편이 어려운 친구로서 간신히 약간의 돈을 빌릴 수 있었답니다. 병원으로 달려와서 원무과장 수녀님(성가병원)에게 돈을 내밀며 남편은 말했습니다.

  "조금 적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전부입니다."

  그러자 수녀님은 돈을 세어 보고 말없이 웃더니 말했습니다.

  "얼마 부족하지 않네요."

  수녀님은 많이 부족한 병원비에서 다시 그이에게 돈을 주며 말했습니다.

  "1만 원은 아기 우유값, 또 1만 원은 산모와 아기와 택시 타고 가시고 나머지는 직장 구하는 데 필요한 교통비로 쓰세요."

  그이는 원무과 사무실에서 그동안 가슴 조이며 뛰어다니던  설움과 고마움에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답니다. 수녀님은 그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제가 보기엔 꼭 성공하실 분이에요. 앞으로 큰사람이 되었을 때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도움을 주도록 하세요. 지금 이것은 아기를 위해 외상으로 드리는 거예요."

(MBC라디오 여성시대 주최 신춘편지쇼 대상 수상자)


    외상으로 살린 아들 - 전부순

  지금부터 30년도 더 지난 일이군요. 1960년 10월에 신랑은 이불짐을 지고 저는 아기를 업고 자그만한 보따리를 들고 금호동 달동네를 찾아들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열심히 살려고 애를 썼지만 하늘도 무심한지 우리 아기가 병에 걸렸습니다. 이듬해 여름의 일이었지요. 아기를 보는 사람마다 오래 못 살겠다고 눈짓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그때 돈이 없어서 아기를 병원에도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그저 불쌍한 우리 아기가 죽으면 서울 어디에다 묻을 것인가 그런 걱정만 하던 몹쓸 어미였지요.  그런 어늘 날이었습니다. 아기를 업고 돈 300원을 들고 왕십리를 향해 무작정 걷고 있는데 보건병원이라고 씌어진 간판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희는 그때 끼니도 잇기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저는 아기를 업고 병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원장 선생님의 "아기 때문에 오셨군요"하시는 말씀에 저는 대답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원장 선생님은 "어디 보자"하시더니 아기를 진찰하셨지요. "저는 저... 저... 가진 것이 300원밖에 없는데요"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원장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치료비는 외상입니다. 다음에 가져오셔도 돼요. 그런 걱정 마시고 아기는 사흘 동안 꼬박꼬박 데려오셔야 합니다."

  저는 우물쭈물하다가 "치료비는 얼마인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원장 선생님은 "900원입니다"라고 하셨어요. 제가 그때 갖고 있던 돈 300원을 우선 드렸더니 원장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이거면 됐습니다."하셨어요. 그리고는 앞으로 사흘 동안 매일 아기를 데려와야 한다고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음날 저는 다시 병원을 찾았습니다. 원장 선생님께서는 반가운 얼굴로 우리 모자를 맞아 주셨습니다. 아기를 치료하신 후, 원장 선생님께서는 아기 아버지가 무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별 직업이 없어요"하니까 다시 고향은 어디냐고 물으셨지요. 저희 고향이 충청도 충주라고 말씀드리니까 원장 선생님께서는 "양반 고을에서 살지, 서울엔 왜 고생하러 왔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원장 선생님의 배려로 우리 아기는 사흘 동안 외상으로 병원에 더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병도 깨끗하게 나았구요.  한 달 뒤였습니다. 저는 700원을 어렵게 마련해서 병원을 찾아 갔습니다. 원장 선생님께서는 기뻐하시면서 "어, 조진영이 왔구나"하고 우리를 반겨 주셨습니다.  원장 선생님께 저는 준비한 돈 700원을 드렸지요. 그랬더니 그분은 다음에 아기 아버지가 돈 많이 벌 때 가지고 오라고 하시면서 돈을 한사코 받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너무나 부끄럽고 고마워서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 저는 2천 백 원을 마련해서 늦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다른 의사 선생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저는 놀라서 그분께 물었습니다. 먼저 계시던 의사 선생님께서는 어디로 가셨느냐고요. 그랬더니 그분은 이민을 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쩔 줄 몰라하다가 새로 오신 의사 선생님께 말했습니다.

  "그 선생님께 우리 아기의 병원 치료비를 드리지 못했거든요. 선생님께서 외상값 2천 백 원을 대신 받아 주세요."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제 부탁을 거절하셨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대신 전해 주세요"하고 부탁드려도 선생님께서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아기가 아프면 데려오라고 하셨지요. 저는 할 수 없이 그 자리를 그냥 돌아서 나오고 말았습니다. 저는 1969년도에 운전면허를 따서 지금은 개인 택시를 몰고 있습니다. 지금도 무학여고 앞에 있는 보건병원을 지날 때면 꼭 그 원장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차를 몰고 있습니다.

(MBC 라디오 여성시대 주최 신춘편지쇼 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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