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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윤성근 - 시간의 고문을 이기기 위하여


내가 그대에게 하는 잦은 말들이
그대 영혼을 조금이라도 흔들지 못한다면
시는 있어서 무엇하리.
내가 그대를 앉은 자리에서 편찮게 하는
바로 그 마음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작은 증거
오늘은 이미 날도 어둡고
이 어둠의 그리움조차 길을 잃었지만
아아, 나는 거듭 거듭 이 말 하고 싶네.
기다려야 하네 먼 길 가야 하네
바람부는 데 몸 상한 갈대처럼
누워서는 안되네.
시름겨운 저 강물 위에 맨발로 서야 하네.
가야하네, 비에 젖은 전신 풀내음으로 물들이며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가야 하네.
목젖 깊이 신음소리 내뱉으며
헐은 입천장으로 사람의 말 뱉아놓으며.

 - 시 "당신에게"전문


  제이씨이, 처음으로 그대에 대한 글을 적기 위해 이런 제목을 달고 나니 실재했었고, 또 실재하고 있으며, 또 당분간(폐가 공기를 수용할 때까지)실재할 당신 혹은 너에 대해서 다소 불경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시간은 그 홀로 완성되었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데. 그것은 흡사 4학년, 8학기를 마치면 그뿐이지 성적이 나쁘다고 해서 다시 대학을 다닐 수는 없는 것과 같지 않겠니. 하지만 그 무슨 호사취미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그 누구라도 돌아가고 싶지 않으랴. 다시 그 찢어진 필름을 이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아아 추억은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을. 그런 사실을 직관적으로 아는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밖에는 이야기할 수 없고 나는 또 현재 강남역과 양재역 사이에 묶여 있을 따름이다.

  전경 하나

그날 문리과 대학 앞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신축교사의 무슨 상량식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고 격앙된 사람들의 표정은 지금도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바로 그날 나는 당신 혹은 너를 보았다. 그러나 그저 보았을 뿐 사실 본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눌한 나로서는 그렇게밖에는 우리가 만난 순간을, 아니 정확하게 그대를 본 순간을 반추할밖에 없다. 하지만 그대를 본 순간이 어떤 하나의 영화 장면 같았을 리는 없고 그저 타는 봄볕과 진짜 영화의 몹신 같은 그런 허황한 어지럼증이 동반하는 순간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알수 없이 휘몰아쳐 오던 1980년 초반의 정국을 닮은 것 같은 여러 학내 사정과 잦은 데모대로의 대오형성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이 있었던가. 아, 나는 시청 앞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었다. 그 위를 몇 사람의 발길이 지나간 후 겨우 대열에서 밀려났을 때 나는 당신을 언뜻 보았다. 처음 나는 당신이 나를 알아본다고, 그래서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당신은 또 당신대로 의경에게 두 팔이 거머잡힌 채 끌려나가는 중이었다. 나는 당신 쪽으로 가려고 한 것은 아니고 퇴로를 찾으려다 어쩌다 당신과 함께 닭장차에 실려 경범재판에 회부되었다.

물 위에 떠 있었어. 물흐름에 나를 맡기고 그 굽이치는
순환의 논리에 몸을 주고 엉켜서 비로 내리고 있었어.
구체적인 아스팔트를 구체적으로 적시며
그냥 숨죽여 있었어. 소탕당하지 않으려고 절반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누워 있었어.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사람처럼
생각이 난 사람처럼
태어남은 죽음에 예비되어 있고
쓸쓸함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느껴졌던 것.


  전경 둘

다시 그대를 만났을 때 우리는 목련 밑에 서 있었다. 그대는 자신의 어머니 말을 빌려 4월에 목련이 피면, 잎도 먼저 피지않은 것이 꽃이 먼저 벙근다고, 불길하다고 들려줬다. 그랬던 것 같다. 그래야 이 글을 계속 적을 수 있기에. 아마 처음으로 맞는 야유회에 주말을 낀 산행이었던 것 같다. '천국'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연일 신문들은 학살의 시간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고. 그리고  국방장관이 전방지역을 순시하다 지뢰를 밟았다던가 아니라던가 하는 소식이 숨가쁘게 들려오고, 그리고 이런 것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그 여행의 한 끝에서, 그 치기와 불필요한 마음씀과 어둠과 그것들을 환히 찢어내는 캠프화이어의 불길 속에서 나의 사진은 인화되었다. 나는 누군가의  옷깃을 잡고 병나발을 불고 있고 또다른 한 손에는 보기 싫을 정도로 젖혀진 등산복 한 자락이 보이고. 다음날 나는 위벽을 날카롭게 갈라놓는 자각증상과 함께 눈을  떴다. 열려진 텐트의 한켠에는 그대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청춘의 날들이 거기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꿈 속에서 낯선 짐승이 되어 잘 모르는 도회의 한켠을 배회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함께 보고  있었다. 그 도시는 고관대작이 즐거운 도시오, 가진 배가 더 배부른 도시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갖지 못해 아우성치는 도시였다. 감히 말하건대 그 도시의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보잘 것 없는 처지의 사람이 되어(그 전부터  이미 되어) 우리는 어두워지는 성녘과 황혼의 거리를 예감처럼 술렁였다. 어쩌다 주머니에 두 사람분의 버스비만 있어도 행복했던, 적어도 행복한 것처럼 여겨졌던 시간이요 공간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철 지난 바닷가를 걸었다. 가까운 항구도시의 어둠은 우리를 낯설게 감싸고 광포한 바다가 거기 있었다. 한 순간 해일이 일어 우리들의 가는 길을 막을 때 그때는 그 맞아섬이 또 얼마나 두려운 것이던지. 그래서 나는  인상을 쓰고 담배를 피워 물었던 것 같고 그런 나를 그대는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눈으로 뜨악하게 올려다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손수건 한 장을 깔고 젖은 방파제의 한켠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면서 나는 왜 그리 앞이 막막한 감정 속에 뒤척였던지. 아마 이럴 때 시인이라면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배, 미쳐버린 바다 위를 떠도는 배
세상은 어두워져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내리 사흘을 울고난 뒤, 나는 목이 쉬었다.
이해하라, 대책없는 삶을
그것이 비록 어리석음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그래서 더 큰 어리석음을 부른다고 해도.


  전경 셋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헤어짐은 너무나 당연하게 나를 목죄여 왔고 우리가 결국 마지막 만나던 날. 나는 뒤돌아선 그대를 쫓아가다 차에 치일 뻔했고. 그때 대형 트럭에  치이지 못한 내 가슴은 더 큰 상처가 되어 오래 나를 불면으로 빠뜨렸고. 그날의 일들을 떠올려보자. 이제는 잘 기억해낼 수도 없이 오래된 기억들을. 적어도 무슨 눈물바람을 하고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만 그러나 현실은 적어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오래 다니던 다방의 종업원은 먼저 차를 한 잔 가져왔고, 나는 자랑스럽게 '신동아'에 실린 내 시 한편을 꺼내 보였고. 빌어먹을, 무슨 무슨 말 같지 않은 말들과 그것보다 더 하잘것없는 오해가 증폭되어 나왔고, 고성이 오갔고, 상대에게 서로 상처줄 만한 말들을 찾으려는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의 순간들이 흘렀고 그리고 기어이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발화되었고, 물잔이 엎질러졌고, 그 물잔을 주으려다 찻잔을 쏟았고, 또 전화가 알 수 없는 곳에서 걸려와서 잠시 불편한 침묵의 순간이 연장되었고, 그리고 나는 서울로 왔다. 그러나 마지막의 순간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보이지.
어둠의 한갓진 곳을 태워 대지는 불타오르고
우리가 누으면 천장이 코 끝에 다가오던
최후의 야시장터 같은 그곳
해변의 집.
우리들의 몸을 간지르던 모래알들
사기그릇 같은 너의 가슴을 찌르며 쏟아지고
천국을 딛고 선 느낌이었지.
성냥곽 같은 해변의 집.
어두워지기 전에 우리는 바닷가를 거닐고
해가 뜨자마자 빨래를 내다걸었지.
우리들의 머리카락은 알맞게 소금향기를 풍기고
먼길 떠났던 사람들은 몸져 돌아오곤 했지.
아, 그러나 그대 눈떠 보면
지금은 '잔혹'이 불을 뿜는 시절
습지에선 앓아누운 풀들의 신음소리
로켓탄이 하늘에 시위를 매기는 이곳에서
나는 바라본다.
그리운 해변의 집, 그 모든 것.


  전경 넷

그리고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단 하나의 만남과는 무관한 삽화 하나를 제외하고는. 하숙집에 전화를 쓸 수 없었던 그 시절, 나는 곧잘 S대학 구내의 공중전화를 이용하려고 저녁이면 외출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이 삽화는 그날 이뤄진 것이다. 첫 번째 통화는 불발이었다. 그날 두 번째 통화는 아주 늦은 시간에 이뤄졌다. 지금 나는 술을 먹든 안 먹든 그것 때문에 별반 실수를 잘 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아마 그대의 아버지가 전화를 받은 것 같다. 그분은 내가 80년대초 어느 성당에 숨어있던 그대의 옛애인을 고지했다고 지금까지도 오해하고 있는 바로 그분이다. 상당히 고압적인 말들이 오간 후, 내 마음에도 이렇게까지 할건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든 후에도 나는 무어라고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취직도 아직 못한 '나'는 그 무엇엔가에 상당히 양분해 있었던 것인데. 어찌 어찌 되어 당신이 전화를 받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꼭 그럴 것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말들과 행동들이었다. 자신을 떠난 후 다시 나를 바라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고백하지만 그러고도 다시 통화가 이뤄지지 않은 전화를 몇 번이고 술에 취해 걸었던 건 나였다. 또 두서없이 씌어진 편지들은 어쩌구. 그때 나는 열병을 앓는 환자였고 당신은 나를 고쳐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여러 증상이 혼효되어 있어서 어느 한 가지를 고쳐서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의사였다. 하여튼 몇 번이고 나는 수화기를 들고 아직도 직장을 구하고 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외쳤는데 어눌한 내 목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 을지로에서 정릉을 넘어가지 못하고(비끼어 가고)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영 혼자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이후 나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기로 했다. 눈이 형편없이 나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전화도 편지도 쓸 수 없게 된 내 처지를 사랑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또 그것이 내 자신이었으므로.

  이제 나는 그 시절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있다. 잘 지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시절의 유일한 생존자다. 싫든 좋든 나는 귀환했고 이제 다시는 그대와의 지난 시절로 돌아가지 못한다. 다행히 나는 아직 그대를 그날 이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현재 내가 아는 그 누구도 그대의 존재에 대해서 모른다. 고마운 일이다. 그런 점에 착안하여 나는 무난하게 살아갈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감사한다. 그리고 지난 시절들이 점차 더 완벽한 형태로 잊혀져 가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 고통이라니, 그건 겪어보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자신이 없고, 그 정도는 정직하다. 이제 이 글은 끝났다. 가슴이 얼얼한가, 아마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윤성근 1960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리 사는 세상',  '먼지의 세상', '소돔성 1990', '나는 햄릿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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