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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71121171437&Section=04
르네상스, 무엇이 문제인가?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 <10> 부르크하르트와 르네상스 ①

1) 르네상스, 무엇이 문제인가

근대의 시작으로서의 르네상스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의 <비너스의 탄생>은 르네상스기 미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 그림과 같은 르네상스 미술에서 보이는 세련된 아름다움은 르네상스 문화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하다.

오늘날 르네상스는 매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한국에서도 그렇다. 호텔이나 술집 이름에도 붙어 있을 정도이다. 그것은 르네상스라는 단어가 세련된 것, 아름다움, 근대적인 것 등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르네상스(Renaissance)는 프랑스어재생, 부흥이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이탈리아어의 같은 의미를 갖는 리네시타(Rinescita)에서 온 것으로 19세기 중반부터 하나의 시대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서양사에서 르네상스란 보통 14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그리스 · 로마의 고전고대 문화에 기초해 새로운 근대문화가 발전한 시기를 가리킨다. 유럽에서는 5세기에 로마제국이 몰락하고 나서 오랜 문화적 암흑시대가 있었는데 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 고대문화가 되살아남으로써 근대를 향한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인들은 르네상스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의 전환점으로 받아들인다. 또 18세기의 계몽사상과 함께 유럽의 정신문화 발전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단계로 생각한다. 그러니 서양 사람들이 르네상스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매우 독특한 사람들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그들이 방금 빠져 나왔다고 믿은 중세의 '암흑시대'와는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는 자신들이 발전시키고 있던 위대한 웅변이나 시, 조각, 회화들이 없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를 중세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시대로 규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스위스 역사가인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이다. 그가 1860년에 낸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라는 책에서 르네상스를 중세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시대로, 또 근대의 출발점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 1818-1897)와 그가 쓴『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 1860

그의 이런 규정은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르네상스는 그 후 하나의 시대 개념으로 자리 잡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보통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주로 부르크하르트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인들은 르네상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나?

그러면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들이 새로운 근대국가를 만들었고, 인문주의라는 학문을 통해 고대의 세속적인 가치를 다시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의 억압을 분쇄했고, 신분제를 해체함으로써 인간중심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었으며 근대 자연과학의 기초를 다졌을 뿐 아니라 새로운 근대적 예술 양식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 호이징하 (Johan Huizinga, 1872~1945)와 그가 쓴『중세의 가을』, 1919

이런 주장이 비판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의 호이징하라는 유명한 네덜란드 역사가를 비롯하여 오늘날의 많은 중세사가들은 르네상스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한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중세적 특징들이 많이 나타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르네상스를 부르크하르트가 처음 주장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전문 역사가 사이에는 옹호하는 사람보다는 비판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럼에도 그가 만든 틀의 큰 테두리는 상당부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매혹되지 않으면 르네상스가 아니다'라는 말이나 '유럽은 그들(인문주의자)이 부르짖은 인간성의 능력과 지성에 대한 신뢰를 결코 잃은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은 서양의 삶과 사상에 있어 가장 큰 영감으로 남아 있다'는 최근 서양학자들의 말은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은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이 기본적으로 서양 사람들의 자부심을 만족시켜줄 소지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14세기부터 유럽에는 근대 문화적 요소가 나타났고 그 결과 유럽은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빨리 근대로 진입할 수 있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르네상스가 바로 근대세계에서의 서양문화의 우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의 큰 생명력은 이렇게 그의 주장 속에 담겨 있는 유럽중심주의적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르네상스는 아직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을 대체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르네상스는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찬양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2) 부르크하르트의 인물과 역사를 보는 태도

보수적인 역사가 부르크하르트







▲ 바젤(Basel)시

부르크하르트는 1818년에 스위스의 바젤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청년기에 독일베를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역사학자로서의 길을 시작했다.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와 바젤 대학의 역사학 교수가 되었고 80세라는 긴 수명을 누렸다.

그를 저명한 역사가로 만들어준 책이 40대 초에 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이다. 이 책은 쉽고 재미있으며 하나의 시대로서의 르네상스의 특징을 그 나름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르네상스를 공부하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하는 기본서적에 속한다.

그는 어떻게 보면 매우 까다로운 사람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검소하게 살았으며 정치를 믿지 않았고 돈에 무심했다. 또 작지만 코스모폴리탄적인 분위기가 가득 차 있었던 바젤을 매우 사랑했다. 그 도시가 유럽 문명의 진정한 요소들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 부르크하르트가 교수로 재직했던 바젤 대학

르네상스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의 태도는 그의 타고난 정신적인 기질이나 역사를 연구하는 방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는 성격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던 국가 사이의 군사적 경쟁이나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또 산업화에 따른 물질적 진보를 매우 싫어했다. 그것이 그가 역사에서 높이 평가하는 문화적 가치들을 파괴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예술이나 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가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에 강한 애착을 보인 것도, 또 문화사를 연구의 주된 주제로 삼은 것도 이런 관심 때문일 것이다. 반면 경제와 관련된 사항들은 별로 다루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역사연구에서 하나의 결함이다. 경제와의 관계를 빼고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 그가 역사를 연구하는 방식도 일반 역사가들과는 좀 다르다. 역사연구를 좀 더 창조적인 작업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직관적인 역사쓰기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헤겔의 제자들로부터 헤겔철학을 배우고 랑케로부터는 직접 역사학을 배웠다. 그러나 당시 독일 지식인 사회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던 이들의 학문으로부터 별 자극을 받지 않았다. 학문적인 성향이 그들과 달랐던 탓이다.

그는 우선 헤겔식의 '역사철학'을 거부했다. 헤겔은 역사란 '자유의 정신'이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역사를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거부한 것이다. 역사의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고 철학적 개념이니 그럴만하다.

또 객관적 역사 쓰기를 목표로 하는 랑케의 실증주의적 연구 방법도 거부했다. 랑케의 목표는 과거의 일어났던 사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역사적 사건들의 원인과 경과, 결과를 사료를 뒤져 꼼꼼하게 따지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면 객관적인 역사쓰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역사를 오히려 예술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신이 다루는 시대의 정신을 생생하게 상상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 역사가가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일반적인 역사가들이 하듯이, 역사책에 사료의 출처를 밝히기 위해 주(註)를 꼼꼼히 붙이는 지루한 일 따위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해 봤자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구성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어떤 사물을 보고 순간적으로 얻는 느낌인 직관이 역사를 이해하는데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렇게 역사를 쓰는 방식에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의 창조적이고 독특한 시각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료에 근거해서 엄격하고 쓰지 않으므로 역사가의 주관적인 관점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잘못하면 역사의 모습을 크게 왜곡시킬 가능성도 있다.

그의 주장이 독창적이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키지만 학문적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 이런 아마츄어리즘은 당대에도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니 오늘날 그의 연구가 심각한 비판대 위에 서 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면 르네상스에 대한 그의 주장과 문제점들을 간략히 살펴보자.


/강철구 이화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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