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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칡넝쿨로 다리를 놓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거의 무인지경같이 밀고 올라왔으나, 날이 갈수록 정세는 달라져 갔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들기 시작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각처에서 봉기해 의병이  되고, 또 자진해서 군세에 가담하여 왜병을 괴롭혀대니, 그들은 빼앗은 땅을 점의 형태로 연결하여 유지했을 뿐, 한때도 마음놓고 쉴 겨를이 없어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명나라의 십만 대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계속해 내리 밀었을 때, 당대의 인물로서 도체찰사의 임무를 띠고 그 이름을 드날렸던 서애 류성룡이 그의 수기인 <징비록>에서 자신의 체험담을 이렇게 싣고 있다.

  임진년(1592년)의 이듬해인 계사년, 남하해 내려오는 명나라 군사의 앞을 서서 나오며 주선을 하는데, 때마침 겨우네 얼었던  임진강이 녹으며 얼음덩어리가 강을 덮어 떠내려 오니까 군대를 건네야겠으니 다리를 놓으라고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요구해 왔다. 강에 떠 있는 배를  모아 연폭해서 서로 잇고 그 위로 판자를 깔아, 공식대로의 주교를 놓았으면 좋겠으나 배는 모두 하류쪽 강 어구에 있고, 흘러내려오는 얼음덩어리에 막혀 배를 끌어 거슬러 올라올 방도가 없다. 그렇다고 시일을 지체할 수는 없고 참으로 어렵게 되었다. 류성룡이 말을 몰아 금교역에 이르러 보니 황해도의 수령들이 사람들을 데리고 명나라 군사의 식사 준비를 하느라 벌판 가득히 웅서거리고 있었다. 그 중에서 우봉현령 이희원을 불러, 수하에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수백명은 족히 된다고 대답했다.

  “곧장 사람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칡을 있는대로 끊어서 내일 일찍 임진강 나루까지 지워가지고 오게. 지체해서는 안되네.”

  이튿날 현장인 임진강엘 달려가 보니 경기감사랑 여러 사람이 모여 있건만 멍청하니 아무도 손대지 못하고 있다. 곧장 우봉 이희원의 사람들이 가져온 칡으로 백사장에서 동아줄을 틀게 하였다. 처음에 꼬기 좋을만한 굵기로 틀어 그것을 합쳐서 꼬으니, 굵기가 두어 아름이나 되고 길이는 강을 여러번 가로지르고도 남는다. 한편, 강 양쪽에다 두 개씩 튼튼하게 기둥을 박고 장목을 가로 걸치고 동아줄의 양끝을 걸게 했다. 그러나 곧 중간이 쳐져서 물에 잠겨 버리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일에 인력만 낭비했다고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엔 천명이나 넘는 군중에게 제각금 작대기 하나씩을 들고 동아줄에 꽂아 일제히 틀게 하였다. `영차 영차` 소리를 내며 바싹 틀어서 당기는 그제서야 다리가 팽팽하게 물위로 뜬다. 이렇게 해서 열다섯 가락을 나란히 걸친 위로  버들가지를 쳐다 깔고, 다시 풀과 흙을 펴니 평지나 다를 바 없다.

  “자! 이제들 건너가라.”

  명나라 군사들은 좋아라고 채찍을 휘둘고 신이나서 말을 달렸고 포차랑 군기들까지 잇달아 건너다  보니, 이 견고한 줄다리도 많이 쳐져서 중간쯤에는 많은 보병들이 강 위쪽 얕은 여울을 발벗고 건너게 되었지만 별로 탓하는 기색이 없었다. 본래 명나라 군사들은 `우리는 구원병이로다` 하는 우월감에서 `너희 나라도 과연 인물이 있나? 어디 좀 보자` 하는 식으로 난제를 던지는 일은 전란 중에도 몇 차례나 있었다. 그중의 하나로 이여송이 압록강을 건너 우리땅에  들어서자, 물론 서로가 필담이나 통역을 거치지 않고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이이긴 하지만, 아무 말도 없이 손을 앞으로 쑤욱 내밀었다. 무언가 달라는 기색이다.

  “내 십만 대군을 거느리고 너희들 나라를 구하러 나왔으니 내어 놓으라.”

  그것이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금품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게고...  그때 접반사로 나갔던 한음 이덕형이 수하들에 들려 가지고 간 기다란 상자에서 두루말이로 된 문서를 꺼내, 이 역시 말없이 이여송 앞으로 쑤욱 내밀어 건네었다. 이여송이 그것을 받아들고 펼쳐보고는 빙그레 웃는다.  말로 하진 않아도 속으로는 그랬을 것이다.

  “이 나라에도 인물은 있구나!”

  아무 준비도 없이 기다렸다면 한바탕 소란을 피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통천문하여 날씨 돌아갈 것을 예측하고, 하달지리하여 땅의 지세와 교통로, 이용할 수 있는 지형지물과 작전에 방해가 될 지 모를 여러 가지 조건들, 바로 그런 것들이 적힌 문서였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는 전략이 서질 않는다. 그 뒤 류성룡은 자신의 한 일을 반성하여 이렇게 썼다.

  “그 당시 좀 더  많은 칡을 장만하여, 한 삼십 가닥쯤 동아줄을 건너 질렀더라면, 나머지 군사들도 여울을 발벗고 건너지 않았을 터인데...”

  그리고는 그 뒤 그는 <남북사>란 책을 보다가 옛날 전국시대 때 제나라가 양나라를 쳤을 때,주나라와 힘을 합쳐 이를 막았는데, 강의 좁은 목에 큰 새끼줄을 갈대로 엮어 다리를 놓고 군량미를 옮겨 쌓았다는 기사를 읽고는 깨달았다.

  “내가 처음 생각해 낸 줄로만 알았더니, 옛날에 이미 써먹은 적이 있는 방법이었구나!”

  그러나 그러한 좋은 착상이 누구에게나 그렇게 쉽게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이순신의 거북선도 그렇고, 최윤덕이 군사들에게 풀빛옷을 입혀 수풀 속을 통해 적의 배후로 숨어들게 한 것도 그렇다. 잠도 제대로 안자고 골똘히 연구한 끝에라야  영감이 떠오르지, 아무에게나 그렇게 쉽사리 떠오르는 예지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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