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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 퇴임 아버지의 구겨진 이력서

[오마이뉴스 이미나 기자]4월 초순의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께 문자메시지 한 통이 날아왔습니다.

"오늘까지만 근무합니다." 아버지의 문자였습니다. 정년퇴임이 만 55세인 아버지 회사의 사규에 따라 이번 달까지 근무하는 것은 가족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대개 그것이 주민등록번호에 기재된 생일을 전후로 하는 지라 모두 4월 중순은 넘어가야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관례상 한 달 전쯤 받아야 하는 정년퇴임 공지를 3월 말까지도 받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내심 '전산상의 착오로 아버지의 정년이 1년 정도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대도 가지고 있었던 어머니와 저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공지가 하루 전에 나온 것입니다. 그동안 쓰지 않으셨던, 그래서 밀려 있던 휴가들이 10여 일이 넘어, 아버지 생신까지는 남아 있는 휴가를 쓰면 얼추 정년퇴임일과 맞았던 모양입니다.

"평생 항구에서 일하고 싶다"던 아버지의 실직

그래서 아버지는 그 다음날부터 집에 계셨습니다. 물론 산행을 가시기도 했고,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시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집에 계셨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는 거실에서 TV를 시청하시다가 절 맞아주곤 하셨으니까요.

게다가 아직 '서류상'으로는 실업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실업급여를 신청하기에는 너무 일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취업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하셨습니다. 평생을 항구에서 지내오신 아버지 역시 집에서의 시간은 무료했기 때문이죠.

평소 "난 평생 항구에서 일하고 싶다"고 호언장담하던 아버지였기에, 일을 하지 않고 집에 계시는 자신이 스스로에게도 생소했던 모양입니다. 워낙 일을 잘 하기로 평판이 자자한 아버지였기에, 어느 곳에서든 얼른 '모셔갈 것이다'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닥친 현실이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어렵게 알아낸 보세창고의 관리직은 연봉이 아버지의 경력에 비추어 보면 턱없이 낮았습니다. 척 봐도 세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빠듯할 정도였지요. 슬슬 가족 모두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이제 내가 우리 집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인가'라며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고, 어머니도 어머니 나름대로 '이제는 내가 일을 찾아 돈을 보태야 하는 것인가' 하고 고민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보셨던 아버지의 고민은 더 하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바다 사나이'와 닮은 아버지의 이력서


















▲ 아버지의 이력서 우연히 방에서 발견한 아버지의 구겨진 이력서. 우직하고 선 굵은 필체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 이미나


그러던 어느 날, 제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구겨진 종이뭉치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무엇인지 궁금해 잘 펴보니 아버지의 이력서였습니다. 투박하고 우직한 글씨는 항구에 온 인생을 바쳐오신 '바다 사나이' 아버지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경력은 이력서 뒷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취업', '만기 귀국', '사우디아라비아 취업', '만기 귀국', '말레이시아 취업', '만기 귀국'……. 아버지가 80년대 '산업의 역군'으로서 해외 취업을 하셨던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데 날짜들이 매우 규칙적이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본 결과, 1년을 주기로 하여 출국-귀국한 다음, 한 달여 후에 바로 다음 일을 하러 출국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한국에 가족과 친구들을 남겨 두고 해외로 '돈을 벌러' 다니셨던 아버지. 그렇게 5년여 간을 보내시고 어머니와 만나신 후에도 아버지는 일을 놓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평생 그 흔한 '과장' 칭호 하나도 달지 못하고 '주임'으로 퇴임하셨지만 말입니다.

비단 이것은 아버지 하나만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정년퇴임을 앞둔 '베이비붐 세대' 모두의, 그러니까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자신들이 지금의 한국을 일구어낸 일꾼들이었으며, 아직도 현장에서 일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해왔던 일을 계속하게 해 줄 수 없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일'이라는 것도, 그들이 해왔던 일과는 무척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지금껏 한국을 지탱해온, 주춧돌과 같았던 그들을 한 순간에 '정년'이라는 서슬 퍼런 칼날 앞에 내민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여전히 일할 수 있다'는 그들에게, '일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다시 일터로 돌아가신 아버지, 축하해요

참, 아버지는 다시 일하던 회사로 돌아가셨습니다. '1년 계약직'이라는 조건이 걸려 있지만 말입니다. 연봉도 기존에 비해서는 20% 정도 삭감되었지만, 주변 분들은 모두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도 아버지가 성실하고 열심히 일하신 덕을 본다고 대단해 합니다. 아버지도 싱글벙글 이십니다.

후배 직원들이 아버지의 복귀를 축하하며 "계약직"이라고 애정 어린 농담을 던지기도 한답니다. 복귀 첫 날, 과장님이 아버지를 따로 불러 "연봉은 줄었지만, 야근 등 각종 특별 수당이 붙는 일을 많이 배치해 주어 예전과 연봉이 비슷하게 도와주겠다"라고도 하셨답니다.

이제 아버지는 아침에 눈을 뜨시자마자 회사로 달려가십니다. 이제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 '갈 수 있는 곳이 있어 행복하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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