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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고 죽일 것까지야

  옛날의 암행어사는 글자 그대로 몰래 다니는 암행이라, 본색을 숨기는 것이 특색이다. 그래서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고을의 원님이 위세를 보이느라 그랬는지, 공사를 처리하는 등 남의 앞에 나앉으면, 큼직한 부채를 훨쩍 펴서 귀 뒤에서부터 활활 내리부치며 몸을 흔드는 버릇이 있었다. 그 밑에서 명령을 거행하는 사령들이 공론을 하였다.

  “내 저 부채질 못하게 할게, 너 볼래?”
  “임마, 무슨 수로 그렇게 해? 그 어른의 본래 버릇인 것을.”
  “두고 봐라, 내가 성사시키면 너 한잔 사야 한다.”
  그러고는 창 앞으로 바짝 다가가 조그만 소리로 아뢰는 것이다.
  “웬 중년의 남자가 어찌보면 양반 퇴물 점쟁이도 같고, 어떻게 보면 집 잃은 사람도 같은데, 구지레한 옷차림으로 어제부터 장터를 돌아다니며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고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할깝쇼? 잡아 들여서 문초해 보시면...”
  “그래? 아직 너무  떠들지 말고, 너랑 눈치빠른 몇 사람이서  먼 발치로 좀더 살펴 보도록 해라.”
  그리고 내려와서 보니,  원님의 그 위세좋던 부채질은 뚝 끊기어 반쯤만 펴서 든 채, 몸도 안 흔들며 턱 아래로만 힘없이 부치고 있다.
  “내 저 부채질 다시 활활 부치도록 해줄게. 더 두고 보련!”
  “임마, 금방 또 손을 쓸 수는 없지 않아?”
  “그래 그래, 이따 점심 지나서 하기로 하지.”
  원님이 겁에  질려 옹송거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실컷  지켜보다가, 점심때가 지나서 다시 다가가
  “안전님! 어제부터 쏘다니던 그 이상한 과객이 웃말의 김진사댁으로 들어갔는데 자세히 물으니, 그 댁에 드나드는 지관이라는 굽쇼.”
  지위가 낮아 정3품 당상관이 못되는 원님에게는 사또라 부르지 않고 안전이라 부른다.
  “그런걸 왜 어제부터 돌아다녔던고?”
  그러고 나더니 다시 부채는 쫙 펴지고, 귀 뒤에서부터 활활 내리 부치며 몸을 계속 흔드는 본래의 자세로 돌아가더라고 한다.

  행객의 차림새로 보아 암행어사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기가 죽어 있다가, 아닌 것을 확실히 알자 당초의 활기를 되찾은 것이다.


 동래 정씨로 호를 임당이라 하는 유길 상공이 있었다. 중종 10년에 태어나 선조  2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전에 세상을 떠난 분인데, 명문 출신에다 수재로 문과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쳐 좌의정까지 지낸 분이다. 그가 젊어서 호남지방의  암행어사 특명을 받아, 전라도의 최남단인 해남땅에서 진도의 벽파진으로 건너가는 나룻목에 다다라 주막에 들었다. 그런데 이 양반이 곧장 나룻배를 타고 건너는 것이 아니라 역졸들을 불러 모아 쑥덕공론도 하고, 그러면서 며칠을 묵었다. 물론 접객업소의 사람들이란 눈치가 빠른 법이라, 저들은 일행의 정체를 알아차렸고, 사람을 진도 고을로 보내 이러이러한 일행이 와 있노라고 알렸다. 그래 기밀은 알려질대로 알려진 뒤에, 마치 엉덩이 무거운 사람이 자리를 뜨듯, 끙 하고 일어나서 나루를 건넜다. 말할 것도 없이 진도에서는 백성을 늘어세워 환영만 안했을 뿐, “옳지 옳지,  저기 어사의 일행이 간다.”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뒤에, 관청 삼문기둥을 두드리며 김새는 소리로
  “암행어사 출두요.” 하고 외쳤다.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는 터라, 진도원님은
  “어서 오십시오.” 하고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런데 자기 딴에는  얼없이 맞춰 놓느라고 했겠지만, 중앙에서 데리고 간 민첩한 서리들이 검열해 보니 일처리의 귀가 맞지 않는 곳이 여기저기서 퉁겨져 나왔다. 물론 어사의 판단으로 진도군수는 파면되고, 창고는 봉해 놓고 후임 군수가 취임하면 열어서 처리하게 되었다. 이른바 봉고파직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일이 있은 뒤 그의 친구가 물었다.
  “암행어사라는 직분이 불쑥 뛰쳐나와  갑자기 뒤져서 가릴 것은 가리는 것이 본분인데, 무슨 일처리를 그렇게 느슨하게 하였단 말이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설명하는데 당시 진도군수는 무관 출신이라 전투에 나서면 일당백의 용기를 발휘하겠지만, 내정에 대해선 백지이고, 인정이 많아서 단 한가지도 딱 부러지게 처리하지 못했을 터인데, 갑자기  들이닥치면 엉망진창일 것이 뻔하니, 그렇다면 죽여야 하겠는데,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 정도로 해 파면조치로 끝내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각박하게 굴었다가  생전에 잃은 인심으로 죽어서 자손마저 잘되지 않은 가문이 무척 많은데, 그는 이렇게  너그럽게 처신하여 복을 받아 그랬던지 자손도 무척 번창하여 여러 대째 내리 정승판서가 줄달아 나서 회동 정씨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지금 신세계백화점 뒤 회현동에 서 있는 큰 은행나무는 본시 그의 댁 뜰에 있었던 것인데, 일제때 살림이 기울면서 대물려 살던 주택은 없어졌으나, 자손들은 모두 절개를 굳게 지켜, 그 조상에 그 자손이라는 말을 듣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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