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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불태운 건 백성들이다? - 박은봉


왜란이 시작된 지 꼭 17일 만에 국왕 선조는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을 향해 피난길에 올랐다. 깜깜한 새벽, 몰래 도망치듯이 창덕궁을 나서서 도성의 서쪽 대문인 돈의문을 빠져나갔다. 비가 쏟아지는 새벽이었다. 왕이 버리고 떠난 한양성 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세 궁궐이 잿더미로 변했다. 누가 불을 질렀을까?

지금껏 역사학자 이기백의 『개정판 한국사신론』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한국사 개설서와 임진왜란을 다룬 글에서는 백성들이 불을 질렀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재일사학자 이진희, 「조선왕조 궁궐 경영과 양궐체제의 변천」이란 박사 논문을 쓴 홍순민은 백성이 아니라 왜군이라 했다.

여태껏 상식이 되어 있던 ‘왜군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백성들의 손에 불탄 경복궁’, 그래서 ‘떠날 대로 떠난 민심’의 상징이었던 백성의 경복궁 방화설은 과연 사실인가?











<경복궁도>. 1997년 뉴욕의 소더비 경매에 출품되면서 알려진 경복궁 그림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기 전의 모습에 영조 때 세운 친잠비와 채상대를 더해서 그렸다. 18세기 후반 영조 연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간민’과 ‘난민’이 불태웠다는 경복궁

경복궁 방화범을 백성으로 보는 견해는 《선조수정실록》을 근거로 한다.

“거가車駕가 떠나려 하자 도성의 간민姦民이 내탕고에 들어가 보물을 훔쳤고, 거가가 떠나자 난민亂民이 크게 일어나 먼저 공사 노비 문적이 있는 장예원과 형조를 불태우고 궁성의 창고를 약탈하고 방화하여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일시에 모두 없어졌다.”

왕이 한양을 떠난 1592년 4월 30일자 《선조수정실록》 기사다. 여기서 ‘간민’과 ‘난민’은 노비를 비롯한 하층민들을 가리킨다. 《실록》 편찬자는 질서와 기강이 무너진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설명하기 위해 이런 기사를 썼는지 모르나, 20세기의 후손들은 이 기사를 무사안일에 빠져 국가의 안위를 돌보지 못한 무능한 군주와 지배층을 향해 치솟은 민의 분노로 해석해왔다.

그런데 《선조수정실록》보다 40여년 먼저 나온 《선조실록》에는 같은 날짜에 그런 기사가 한 줄도 없다. 다만 사흘 뒤인 5월 3일, 왜군이 도성에 입성하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이때 궁궐이 불탔으므로 왜군이 종묘에 들어가 머물렀다”고 쓰고 있다. 궁궐이 불탔다는 날짜가 서로 다른 것이다.

왕이 떠난 4월 30일 바로 그날,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서애 유성룡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유성룡은 자신이 겪은 임진왜란을 《징비록》이란 한 권의 책에 담았는데, 문제의 4월 30일자 기록은 이러하다.

“돈의문을 나와서 사현沙峴(지금의 서대문구 현저동)에 이르니 동쪽 하늘이 차츰 밝아왔다. 고개를 돌려 도성 안을 바라보니 남대문 안 큰 창고에서 불이 일어나 연기가 이미 하늘에 치솟았다.”

남대문 안 창고에서 불길이 일었다고 했으나, 백성들이 궁궐에 불을 질렀다는 얘기는 없다.

그런데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은 왜 서로 다른 기록을 남겼을까? 《선조수정실록》과 《선조실록》 둘 중 어느 것이 더 믿을 만한가? 《선조수정실록》은 이름 그대로 《선조실록》을 수정한 것이다. 《실록》은 왕이 죽으면 뒤를 이은 왕대에 선왕 치세에 일어난 일을 사초에 근거하여 편찬하는 관찬사서다. 《실록》의 기본사료가 되는 사초는 제아무리 왕이라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이는 역사기록으로서의 객관성과 공정함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그렇게 엄정하게 만들어진 《실록》이 수정된다는 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선조실록》은 역대 실록사상 최초로 수정본을 냈다. 왜일까?











선조의 국문교서. 피난길에 올랐던 선조는 서울로 돌아오기 전, 모든 백성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글로 쓴 교서를 내렸다. “왜적에게 잡혀간 백성의 죄는 묻지 않는다. 왜군을 잡아 오거나 포로가 된 백성을 데리고 나오면 신분을 따지지 않고 벼슬을 시켜준다”는 등 백성을 회유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선조실록》에는 없는 ‘간민’과 ‘난민’

《선조실록》은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8년(1616)에 편찬되었다. 그런데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자마자 《실록》을 고쳐야 한다는 의논이 고개를 들었다. “적괴賊魁에 의해 편찬되어 부끄럽고 욕됨이 심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적괴란 광해군 때의 집권 세력이었던 북인을 말한다. 북인과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로서는 북인 정권기에 쓰인 《선조실록》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괄의 반란, 병자호란 같은 중요한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나는 바람에 《실록》 수정은 오랫동안 진행되지 못하다가, 호란이 끝난 지 5년 뒤인 1641년 이식, 최명길 등의 상소로 수정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이 완성된 것은 효종 때인 1657년이었으니 인조반정 후 무려 34년 만이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비교해보면 정치적 입장이나 평가가 엇갈리는 문제에 대해서 적잖은 차이가 있다. 인물평도 사뭇 다르다. 《선조실록》에는 서인인 이이나 남인인 이황에 대한 기사가 아주 간략하거나 비판적인 데 비해, 《선조수정실록》은 매우 자세하고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극찬하고 있다. 《선조수정실록》은 동인인 정여립 사건을 자세하게 다루면서 정여립을 명백한 역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비해, 《선조실록》은 정여립 사건을 맡았던 정철이 서인인지라 옥사를 지나치게 확대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명칭도 다르다. 《선조실록》의 원명은 ‘선종공경대왕실록’인데, 《선조수정실록》의 원명은 ‘선조공경대왕수정실록’이다. ‘종’이 ‘조’로 바뀐 것이다. 국난을 이겨낸 공로가 크다 하여 ‘종’에서 ‘조’로 바꿔주었다.

역대 실록에 비해 《선조실록》이나 《선조수정실록》은 둘 다 탄탄한 사료를 기초로 하여 완성도 높게 편찬되지 못했다. 전쟁으로 사초를 비롯하여 《실록》 편찬에 필요한 기초 사료들이 몽땅 없어진 바람에 개인의 문집이나 일기, 개인이나 문중이 갖고 있는 자료들을 끌어모아 가까스로 편찬한 것이니 어느 쪽이 확실히 믿을 만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선조실록》이 총 221권 116책, 《선조수정실록》은 총 42권이니 《선조실록》이 훨씬 상세하고 풍부하다. 또한 《선조수정실록》에는 병자호란 후 점점 더 경직되어가는 서인 정권의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선조실록》에는 없는 ‘간민’과 ‘난민’의 방화가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하게 된 것은 당시 서인 정권의 경직된 대민 의식의 반영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경복궁 근정전.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경복궁의 정전正殿이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였다.

일제시대에 정설로 굳어진 방화설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한 백성들의 경복궁 방화설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정설로 굳어졌다. 1934년 편찬된 《경성부사京城府史》는 ‘경성의 화재’라는 제목으로 《선조수정실록》보다 훨씬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처음에 천민 등이 공사비의 문적이 소장되어 있는 장예원을 불살랐던 것은 이 기회를 타서 자기의 호적을 인멸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다음에 미창米倉인 선혜청 및 각 궁궐 등에 미친 것은 미곡과 재보를 약탈하고 그로써 죄적을 감추려는 짓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왜군은 군율이 엄하여 방화나 약탈은 전혀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왜군이 “무정부 상태에 빠진 경성의 질서를 회복해주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경성부사》는 일제시대에 경성부에서 주관하여 편찬한 서울의 역사책으로, 고대부터 일제시대에 걸쳐 상세한 내용과 방대한 분량으로 서울의 역사를 다룬 일제의 관찬사서다. 첫 페이지에 ‘조선총독 우가키 이치나리宇垣一成 각하’라고 쓰여 있고, 다음 페이지에 그의 친필 사인이 들어 있으며, 그 다음 페이지에는 ‘후작 박영효 각하’라는 글과 박영효의 친필 사인이 잇달아 실려 있다.

경복궁은 과연 누구 손에 불탔을까? 《선조수정실록》과 《선조실록》의 기록에 뚜렷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다. 그럼, 당시 텅 빈 한양에 입성했던 왜군 장수들이 남긴 기록을 보자. 다음은 왜군의 선봉대로 가장 먼저 한양에 입성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휘하의 장수 오오제키大關의 전기 《조선정벌기》의 한 대목이다. 5월 3일에 입성한 그는 경복궁을 처음 본 소감을 적어놓았는데, 그에 따르면 적어도 5월 3일까지 경복궁은 건재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궁전은 텅 비었고 사대문은 제멋대로 열려 있었다. 그제야 전각을 자세히 살펴보니 궁궐은 구름 위에 솟아있고 누대는 찬란한 빛을 발하여 그 아름다운 모습은 진나라 궁전의 장려함을 방불케 하더라. … 후궁에는 화장품 향기가 감돌고 산호의 대상에는 화려한 거울이 덧없이 남아 있었다. … 건물마다 문이 열려 있고 궁문 지키는 자 없으니 어디를 보아도 처량하기 짝이 없다….

경복궁의 장려한 위용이 마치 진시황의 궁전 같다며 찬탄하고 있다. 이튿날인 5월 4일 오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부대가 두 번째로 한양에 입성했다. 가토 부대의 종군 승려 제타쿠是琢의 《조선일기》를 보면 이때까지도 궁궐은 그대로였다. 그런데 다른 종군 승려 덴케이天荊의 《서정일기西征日記》에는 사흘 뒤인 5월 7일 “금중禁中에 들어가니 궁전은 모두 초토로 변해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궁궐은 4월 30일이 아니라 왜군이 입성한 5월 4일부터 5월 7일 사이에 불탄 것이고 방화범은 백성이 아니라 왜군이 된다.











일제시대 광화문.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광화문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1927)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그 후 광화문은 한국전쟁 때 또 불탔으며, 1968년 콘크리트로 중건되었다가 2007년 현재 복원공사 중이다.

궁궐을 태운 불길은

왜군이 입성했을 때 한양은 텅 비어 있었다. 왕 이하 고관대작들은 일찌감치 피신했고, 뒤늦게야 왕이 떠난 줄 안 백성들은 허둥지둥 도성 밖으로 도망쳤다. 당시 왕 이하 고관대작들이 보인 행태는 400여 년 뒤 한국전쟁 때, 수도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친 이승만 대통령 이하 고관들의 행태와 놀라우리만큼 닮았다. 선조는 떠나기 전날까지 “내가 한양을 두고 어디로 가겠는가, 염려 말라”는 말을 되풀이하다가 비 쏟아지는 새벽에 성문을 빠져나갔고, 이승만 대통령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라디오 녹음 방송을 틀어놓고 한강을 건넜다.

수도를 되찾은 다음의 행동도 놀라우리만큼 닮았다. 3개월 만에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 못 가고 서울에 남았던 시민들을 공산당에 부역하지 않았느냐고 닦달했고, 1년 반 만에 돌아온 선조는 그 사이 왜놈 말을 익혀 지껄이는 자나 왜놈에게 빌붙었던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영을 내렸다.

경복궁이 누구에 의해서 불탔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구 손에 불탔던들 어떠랴. 중요한 건 백성이든 왜군이든 또 다른 누구에 의해서였든, 당시 궁궐을 태운 불길은 지배층의 나태와 무책임을 질타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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