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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7부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서기 81년 9월 14일~ 96년 9월 18일)

  행운의 여신
  참으로 운명이란 무슨 계기로 바뀔지 모르는 법이다. 인간의 행운과 불운을 행운의 여신이 변덕을 부린 결과로 여기고 싶어하는 인간의 심사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30대 중반에 불과한 트라야누스가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 발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치하에서 유대 전쟁을 치른 군단장이었다. 그러므로 트라야누스는 베시파시아누스처럼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진급한 군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기사계급 출신이라도 본국 이탈리아 태생인 로마인이다. 반면에 트라야누스는, 아버지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배려로 원로원 의원이 되고 귀족 칭호까지 받은 신분이긴 하지만 에스파냐 속주 출신이었다. 이 트라야누스가 9년 뒤에는 네르바 황제의 양자가 되어 최초의 속주 출신 황제가 되었는데, 평온한 에스파냐에서 1개 군단을 지휘하며 세월을 보냈다면 아무리 현명한 네르바 황제라도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속주 출신이 황제가 되면 기존 지배층의 반발을 살게 분명하다. 트라야누스의 이 약점을 보완해준 것이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으로서 9년 동안 쌓은 업적이었다. 로마군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 군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최전방에서 지휘를 맡는 것은 승진이다. 같은 총독이라도, 위험한 전선에서 근무하는 것과 안전한 후방에서 근무하는 것은 무게가 전혀 다르다. 30대 중반에 이 요직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 트라야누스를 황제의 길로 인도한 셈이다. 하지만 트라야누스보다 두 살 위인 도미티아누스에게는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보내지 않았다. 다키아족과의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것을 활용하지는  못했다. 주변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평화협정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수도 빈,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는 모두 로마 군단기지에서 유래한 도시들이다. 빈에서 부다페스트까지  동쪽으로 흘러온 도나우 강은, 거기서 베오그라드까지는 거의 정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가,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흑해로 흘러든다. 고대 로마인은 시대와  무관한 지리적 거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시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정학적 관점에서  도나우 강을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 관점에 따르면 빈까지가 도나우 강 상류, 빈에서 베오그라드까지가 중류, 베오그라드에서 흑해까지가 하류다. 서기 1세기 말의 황제였던 도미티아누스는 이 지역에 두 개였던 속주를 네 개로 재편성한다. 도나우 강 상류인 서쪽에 있는 판노니아 속주를 '가까운 판노니아'(판노니아  수페리오르)와 '먼 판노니아'(판노니아 인페리오르)로 나누고 ,하류인  동쪽에 있는 모에시아 속주를 '가까운 모에시아'(모에시아 수페리오르)와 '먼 모에시아'(모에시아  수페리오르)로 분할한 것이다, 방위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던 게 분명하다. 로마인들이 로마 제국의 존속은 도나우 강 중류에서 하류에 걸친 이 방위선을 지키는 데 달려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게 서기 1세기 말이었다. 도나우 강  상류 지역은 라인 강 연안의 본과 도나우 강 연안의 레겐스부르크를 잇는 '게르마니아 방벽'이 건설되면서 철벽 같은 군사적 국경으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인은 카이사르가 시작하고 티베리우스가 정착시킨 정책에 따라, 아무리 국경을 철벽으로 만들더라도 국경 안팎을 단절시키지 않고 교류를 허용했다. 아니, 사람과 물자의 교류는 오히려 장려했다. 방위선 밖의 부족들에게도 로마에 병력을 제공하거나 물자를 교역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로마와 우호관계가 성립되면, 우방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해도  최소한 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로마는 국경밖에도 우호적인 부족을 갖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있었다. 이른바 '분리하여 지배하라'는 정책이다. 따라서 국경 밖에 사는 부족들의 존재 자체는 위협이  아니었다. 그런 부족들이 단결하는 게 위협이었다. 다키아족이 로마에 위협적인 존재가 된 것은 족장이 왕을 자칭했을 만큼 주변의 약소 부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다키아족의 세력은 유능한 지도자 데케발루스를 얻은 덕분에 더욱 강해진다. 데케발루스는 자기 부족의 거주지인 도나우 강 하류만이 아니라 중류 지역에 사는 마르코만니족, 콰디족, 야지게스족까지 합병하여 도나우 강 북쪽 일대에 왕국을  세우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마르코만니족과 콰디족과 야지게스족은 로마에 병력을  제공하고 물자를 교역하면서 로마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부족들이다.  빈 서쪽에서 베오그라드에 이르는  도나우 강 북쪽에 사는 이들 부족은 게르만계에 속했다,  이들 세 부족이 개별적으로나마 로마에 반기를 들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로마가 다키아에  참패당한 뒤가 아니라 대승을 거두어  설욕한 뒤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같은 도나우 강 북쪽에 사는 다키아족의 압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했기 떄문일까. 어쨌든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서 다키아에 대승을 거둔 로마는 도나우 강 중류 지역에서 새로운 적과 직면하게 되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중류와 하류에서 여러 적과 동시에 맞붙는 것은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첫번째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도 참패를 맛본 뒤에는 열세를 만회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여기서  로마와 다키아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다키아와 평화협정을 맺으면 로마는 중류의  세 부족에 대한 반격에 전념할 수  있고, 대국 로마를 무력이 아닌 외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아넣은 다키아는 도나우 강 북쪽 전역에서 기세를 높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뒤'기록말살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확실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로마와 다키아의 평화협정은 서기 94년 무렵에 맺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부터 도나우 강 중류 지역에서 로마군의 반격이 적극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도나우 강 중류 지역에서 로마군의 반격이 적극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도미티아누스는 다키아 왕의 대리인으로 로마를 방문한 왕자를 우호국 군주처럼 대우했다. 평화협정 내용도 '기록말살형'때문에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려져 있다, 로마가 다키아에 참패했을 당시 포로가 된 로마 병사를 돌려받는 대가로, 포로 1인당 1년에 2아시스를 다키아 쪽에 지불한다는 조항이다. 포로가 몇 명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1인당 1년에 2아시스를 지불하는 것도 영구적인  것인지 아니면 기한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도미티아누스로서는 다키아족의 본거지까지 쳐들어갈 가능성이 멀어진 이상,  본거지에 붙잡혀 있는 로마 병사를 구해내려면  돈으로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2아시스는 공중목욕탕 입장료의 네 배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밀가루 500그램 값에  불과하다. 병사 연봉을 기준으로 하면 450분의1이다. 이만한 비용으로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 대한 걱정을 접을 수 있다면 값싼 대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협약이 로마인들의 비난을  사게 되었다 ,로마인은 1개 군단  6천 명이 전멸한 것도 참아냈다. 그러나 평화를 돈으로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돈이 아무리  상징적인 액수에 불과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패자가 승자에게 바치는 연공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평화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얻을 가티가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제정중기에 접어들고 있는 이 시대에도 로마인들에게는 새삼 생각해볼 필요도 없을 만큼 분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협정이 체결된 직후의 몇 년 동안은 자존심을 희생하여 얻은 이 평화가 큰 효력을 발휘했다. 다키아 왕은 협정을 지켰고 로마둔은 도나우 강 북쪽까지 진격하여,  오랫동안 로마와 우호관계에 있었으면서도 하필이면 이 시기에 로마 영토를 침범한 세 부족을 철저히 응징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도미티아누스는 자주 전선을 시찰하고, 군단기지를 강화하려고 애썼다. 도나우 강 남쪽에 배치된 군단기지가  석조 건물이 늘어선 도시로 변모한  것은 이 시기였다. 우호관계가 된 다키아족의 거주지와 마주보고 있는 도나우 강 하류에서도 군단기지를 도시화하는 작업이 계속 추진되었다 ,평화협정을 맺은 상대에 대해서도 방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로마인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다. 파르티아나 아르메니아와 우호관계가 지속되고 있는데도 그 국경에 군단을 계속 배치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원로원이나 시민에게 불만을 살 줄 뻔히 알면서 굳이 다키아족과 평화협정을 맺은 것은 최고 통치자로서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하나의 '계측기'
   철학은 배웠지만 역사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나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나 고대 로마에 대해서는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가 쓰는  로마사는 학자가 쓰는 로마사가 아니라 작가가 쓰는 로마사다. 그렇긴 해도, 브레히트(독일의 작가)나 유르스나르(프랑스의 작가)의 작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작가라고 해서 제멋대로 쓸 수는  없고, 작품 소재로 선택한 이상 거기에 대해 조사하거나 연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조사와 연구의 필요성은 학자나 작가나 별차이가 없지만, 학자는 사료를 믿는  경향이 강하지만 작가는 사료가 있어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적 '증거'는 크게 역사 기술과 고고학적 성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역사 기술은 본래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남긴 기록이고, 고고학적 성과도 현재까지 발굴된 유물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이 두  가지 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믿을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이다. 역사 기술은 어디까지나 그것을 저술한 사람이라는 '필터'를 통과하면서 한번 걸러진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고고학적  성과는... 예컨대 도시 로마를 보기로 들면 충분할 것이다. 현대의 로마는 고대 로마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로마 제국 시대에 '세계의 수도'였던 고대 로마의 전모를 철저히 밝혀내고  싶으면 전체를 발굴할 수밖에 없다. 폼페이는 매몰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이주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발굴하여  고대 도시를 실상 그대로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다, 폼페이가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적 증거나 사료는 불확실성을 갖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여기에 바탕을 두지 않고는 역사를 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과 의심을 품으면서 참고하는 것은 역시 다르다. 이 차이는 인간성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차이가 아닐까.
  그러면 학자가 아닌 나는 인간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로마사를 쓰면서 내가 판단기준으로 삼은 것이 하나 있다. 최고 통치자인 황제가 행한 일이 공동체(레스 푸블리카), 즉 국가에 이로웠느냐 해로웠느냐를 판정할 때. 나는 타키투스를 비롯한 역사가들의 평가보다는  그 황제의 후임자들이 그의 정책이나 사업을 계승했느냐 아니냐를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이'계측기'를 가지고 평가해보면, 로마 역사상 최고의 통치자는 뭐니뭐니 해도 역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다. 로마 제국은 결국 이 두 사람이 만든 것이다. 로마인들도 이 두 사람만 계속 '신격'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들도  나와 동감이었던 게 분명하다.그리고 이들을 뒤이은 티베리우스와 클라우디우스도 타키투스나  수에토니우스한테는 나쁜 황제로  낙인이 찍혔지만, 내 '계측기'에 따른 평가에서는 상당히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악명높은 로마 황제의 전형인 네로는 어떨까. 파르티아와 항구적인 우호관계가 수립된 것은 코르불로의 훌륭한 준비 작업 덕택이긴 하지만, 코르블로에게 지시를 내린 것은 네로 황제다. 그  결과, 당시의 양대 강국의 우호관계는 무려 반 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그 관계를 깬  것은 파르티아가 아니라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였다. 파르티아와 관계가 좋았던 반 세기 동안 제위에 오른 황제는 내전 기간의 세 사람을 제외하면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다. 이들은 모두  네로가 성립시킨 평화협정을 그대로 지켰다. 그리고 공격형 황제였던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수비형 황제인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우스 피우스는 네로의 외교 노선을 계승하여 또다시 반 세기 동안 파르티아와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외교면에서는 네로의 공적이 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네로의 '도무스 아우레아(황금궁전) 건설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 사업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해 있던 네로가 수도  로마의 도심에 그리스식 아르카디아. 즉 수목이 울창한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해 착수한 것이다. 오늘날의 환경보호론자가 적극적으로 지지할 게 분명한 좋은  동기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좋은 동기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카이사르처럼 "나쁜 결과로 끝난 일도 처음에는 좋은 동기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네로가 꿈꾸었던 '푸른 도심'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콜로세움을 세우고 티투스가 공중목욕탕을 짓고 트라야누스가 그보다 더 큰  공중목욕탕을 짓고 하드리아누스가 신전을 세우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 대도시의 도심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 하는  점에서 네로와 다른 로마인들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도심은 그곳에 모인 시민들이 함께 하는 일에  활용되어야 한다는 로마식 사고방식을 기준으로 하면, 그런 로마인의 심정에 어긋나는 일을  단행한 네로는 최고 통치자로서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네로와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 '기록말살형'에 처해진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업적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그의 업적은 모두 후임 황제들에게  계승되었다. 법을 집행할 때의 지나친 엄격함만 다소 누그러졌을 뿐이다. 미성년자 매춘  금지법도 그후 오랫동안 살아남았다. 하지만 어떤 업적보다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방위선을 연결하여 국방의 기능성을 향상시킨 '리메스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  방벽)일 것이다. 타키투스 같은 문인은 이것을 무시했지만, 도미티아누스의  후임 황제들 가운데 '리메스 게르마니쿠스'를 보강하는 데 신경을 쓰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피아 가도와 마찬가지로, 건설의도가 분명하고 건설 장소가 올바로 선택되기만 한다면 후임자들은 그것을 보강하거나 유지 보수하는 일만 하면 된다. '게르마니아 방벽' 건설은 도미티아누스의 최대업적이라 해도 좋다. 그렇다면 다키아족과의 평화협정은 어떻게 평가하는 것이 타당할까. 서기 96년에 사망한 도미티아누스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것은 네르바다. 하지만 네르바는 1년도 지나기 전에 크라야누스를 양자로 삼아서 후계자를 명확히 한다. 네르바가 죽고 트라야누스가 제위에 오른 것은 서기 98년이다. 크라야누스는 황제가  된 뒤에도 사령관 시절의 임지인 고지 게르마니아('리메스 게르마니쿠스'도 포함된다)에 남아서 전쟁 준비에 몰두한다. 그리하여 서기 101년에 시작된 것이 역사상  유명한 '다키아 전쟁'이다.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성립시킨 다키아족과의 평화협정은 그가 죽은 지 5년도 지나기 전에 트라야누스 황제에 의해 휴짓조각이 되어버린 셈이다.
  로마인들은 역시 돈을 주고 얻은 평화를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다키아족은 로마에 지고도 위세를 올리고 있다"는 타키투스의 개탄이 당시 로마인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두면, 역사가 타키투스는 도미티아누스보다 네댓 살 젊었다. 둘은 말뜻 그대로 동시대인이었다. 도미티아누스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초리가 차가워졌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 자신은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황제가 가진 권력의  절대적 우월성을 믿었는지도 모른다. 이 점도 그렇지만, 고독을 사랑하고 폐쇄적인 성격이었다는 점에서도 그가 본보기로 삼은 티베리우스와 비슷하다. 티베리우스도 그랬지만, 도미티아누스도 제국 통치의 최고 책임자로서 마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은 누구하고도 의논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그중 하나는 교육 개혁이었다. 이것도 '게르마니아 방벽'과 마찬가지로 후임 황제들에게  계승된 정책이다. 아니,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계승되었으니까. '게르마니아 방벽' 보다 더 긴 생명을 누렸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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