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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8 - 시오노 나나미


   제7부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서기 81년 9월 14일~ 96년 9월 18일)

  다키아 전쟁
  서기 84년 겨울, 도미티누스는 7년  동안이나 브리타니아 제패를 혼자 떠맡고 있던 총독 아그리콜라를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타키투스가 '역사' 첫머리에서 "브리타니아는 제패가 끝났는데도 방치되었다."고 씁쓸하게 말한 것은 아그리콜라의 귀국과 함께 로마의 스코틀랜드 제패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칼레도니아를 제패하는 것은 단념했지만, 브리타니아를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도미티아누스는 왜 이제 와서 스코틀랜드 제패를 포기했을까. 그 무렵 도미티아누스가 도나우 강 방위선을 강화하기 위해 군단이 필요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미 도나우 강 하류 지역에서는 강북에 사는 게르만족이 자주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브리타니아에서 도나우 방면으로 군단을 이동시키려면 스코틀랜드 제패는 단념할 수밖에 없다. 전쟁 수행 방식을 바꾸려면 지휘관을 교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공격을 장기로 삼는 아그리콜라 대신에 수비형 지휘관을 보내면 된다.
  도미티아누스의 후임 황제들, 특히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브리타니아 대책으로 미루어 보아도, 서기 84년 당시에 도미티아누스가 채택한 방책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출동해 있는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은 비난의  표적이 되기 쉽다. 아우구스투스는 엘베강을 국경으로 삼기 위해 게르마니아 중심부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그런데 티베리우스가 이런 아우구스의 생각을 물리치면서까지 라인강으로  철수를 감행하자,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맹렬히 비난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의 잘못은 칼레도니아를  활용하지 못한데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무렵 도나우 전선은 로마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공격형 지휘관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도미티아누스가 본국으로 불러들인 아그리콜라를 도나우 전전에 파견하여 다키아 전쟁의 일선 사령관에 임명했다면 도나우 전선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르고, 아그리코라에게 심취해 있던 타키투스도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비난을 상당히 누그러뜨리지 않았을까.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를 본보기로 삼았다지만, 티베리우스는  군사적 재능만이 아니라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 이런 재능과 경험은 전투를 지휘할때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휘하 장수를 등용할 때도 발휘된다. 이 점에서 도미티아누슨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제부터 서술할 다키아 전쟁만큼 도미티아누스의 결함을 분명히 드러낸 사건도 없다.
  교역보다는 해적질로, 농경이나 수공업보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꾸리려는 자가 있는  한, 방위의 필요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방위의 결과가 대화나 타협보다 힘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힘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양쪽의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의  차이 때문이다. 로마 제국은 로마 특유의 공동운명체를 형성하여 제국 내에서는 사고방식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사고방식을 공유하지 않는 외부인들에 대해서는 걱정이 끊일 날이 없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로마사는 서기 5세기에 일어난 야만족의 침입이 로마 멸망의 원인인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오해다. 공화정과 제정을 통틀어 로마의 역사는 야만족 침입의 역사와 완전히  겹친다고 해도 좋다.  수도 로마까지 야만족이  침입한 기원전 390년부터 로마가 다시 야만족에 유린당하는 서기 410년까지 800년 동안 로마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방위력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기 5세기에 일어난 야만족의 침입은 '민족 대이동'이라고 부를 정도의 규모였지만, 동로마 제국은 붕괴를 면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에서는 방위체제가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 이동하는 야만족도 이 동로마 제국을 피해 방위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 서로마 제국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민족간의 충돌이 '사고방식'의 차이 떄문이라 해도 좋은 현실에서, 패배자가 되고 싶지 않으면 방위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로마 황제의  양대 책무는 안전보장과 식량보장이었다. 그리고 '식량'보장은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이기도 하다 황제에 대한 평가가 군사적 업적으로 좌우되는 경향이 있는 것은 황제가 '임페라토르'인 이상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영어로 황제를 뜻하는  '엠퍼러'(emporor)의 어원인 '임페라토르'는 최고 사령관을 뜻한다. 서기 85년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던 어느날, 로마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도나우 강 하류의 북쪽 연안에 살고 있는 다키아족이 대거 강을 건너 로마 영토인 남쪽으로 쳐들어 왔다는 소식이었다. 야만족이 침입했다는 소식은 물론 뉴스이긴 하지만, 충격적인 뉴스는 아니다. 그것이 충격으로 바뀐 것은, 다키아족을 격퇴하러 나간 군단이 참패당하고 그 군단을 지휘하고 있던 모에시아 속주 총독 사비누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이 뒤이어 도착했기 때문이다. 도미티아누스는 직접 전선에 나가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봄에 시작될 로마군의 반격을 현지에서 총지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실전  지휘관으로는 근위대장 푸스쿠스를 데려가기로 했다. 푸스쿠스의 경력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근위대는 국경을 지키는 군단과 달리 전선에서 근무해본 경험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장인 푸스쿠스가 군복만 화려한 근위대장에 불과했다면, 그런  인물에게 실전지휘를 맡긴  도미티아누스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야만족은 전략 전술도 없이 대거 습격해오기 떄문에 대응하기가 어렵다. 그것이 야만족을 상대하는 전투의 특징이다. 정규군은  정규군을 상대하기보다 게릴라를 상대하기가 더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6년 동안이나 칼레도니아에서 게릴라를 상대로 싸운 아그리콜라를 등용해야 했다. 도미티아누스도 개인적으로는 아그리콜라를 싫어하지  않았다. 싫어하기는커녕, 충분한 영예를 주어 경의도 표했다. 그런데 왜 아그리콜라를 활용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도 서기 86년에 벌어진 다키아족과의  첫 전투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5개 군단의 주전력과 그와 거의 같은 수의 보조병 외에 근위대의  절반도 참전했다니까, 로마가 동원한 총병역은 6만 명이 넘은 셈이다. 이렇게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다키아족을 일단 도나우 강 북쪽으로 쫓아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다키아 족장 데케발루스는 전투를 종결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의해왔다. 로마는 거절한다. 도나우 강 북쪽으로 진격하여 다키아족의 본거지를 쳐부수는  것을 두 번째 전투의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전에서 승리를 거둔 데에 만족한 도미티아누스는, 두 번째 싸움은 푸스쿠스에게 맡기고 수도 로마로 돌아갔다. 황제로서 할 일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가 전선에 머물렀다 해도 두 번째 전투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르마니아 방벽'을 구상하고 실행한 사람이니까, 예측할 수 없는  사태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고, 임기응변의 능력만의 비극을 면하게 해준다. 도미티아누스가 보고를 받은 두 번째 전투 결과는 참패였다. 1개 군단 과 근위병은 전멸하고, 총지휘를 맡고 있던 푸스쿠스도 전사했다는 것이다. 군단기인 은독수리 깃발도 적에게 빼앗기는 수모까지 당했다. 다키아족과의 이 전투는  오늘날의 세르비아와 루마니아 일대에서 벌어졌다. 로마군은 다키아족의 본거지인 사르미제게투사로 쳐들어가기는커녕, 도나우 강을 건너 북상하기 시작했을 때 사방에서 협공을 당했다고 한다. 도미티아누스에게는 통렬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로마인이었다. 패배를 맛보았을 때 로마인들이 맨 먼저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설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설욕전 준비는 1년 동안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로마에서는  패배를 경험한 부대를 후방으로 돌리고 새로운 병력을 투입하여 설욕전을 벌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패배를 맛본 병사들을 다시 전선에 투입한다. 로마군만큼 '설욕'이라는 낱말이 어울리는 군대도 없었다. 사령관이 전사했기 때문에 후임 사령관을 선정해야 한다. 이번에는 신중하게 골랐다. 도미티아누스가 임명한 사령관은 율리아누스였다. 모에시아 속주에  주둔하는 군단장을 지낸 경험이 있고, 기사계급 출신인 푸스쿠스와는 달리 원로원 의원에다 집정관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이 인사에서는 원로원의 비판을 피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렇긴 하지만, 현지 사정을 잘 알고 다키아족과 싸워본 경험도 풍부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설욕전에 투입할 병력을 증강하지는 않았다. 전사자들 때문에 생긴 구멍을 메우기 위해 카르타고에 주둔해 있는 1개 대대가 지중해를 건너 도나우 강까지 이동했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정도였다.
  서기 88년, 로마군을 이끌고 도나우 강을 건너 다키아 땅으로 진격한 율리아누스는 교묘한 움직임으로 적을 유인하여 평원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한다 로마군은 넓은 평원을 무대로 벌어지는 회전에서는 천하 무적이었다. 결과는 로마군의 대승이었다.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다키아족 병사들을 이번에는 로마군 병사들이 쫓아가서 죽였다. 하지만 다키아족의 본거지까지 쳐들어가지는 못했다. 겨울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지방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지를 알고 있는 율리아누스는 도나우 강 남쪽으로 철수한 뒤, 배다리를 해체하고, 이듬해 봄까지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었다.


  반란
  불만은 대개 상황이 나빠졌을 때 분출하는 법이다. 그러나 서기 88년에서 89년에 걸친 겨울은 상황이 호전된 시기였다. 따라서 왜 그런 시기에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사투르니누스가 휘하의 2개 군단을 이끌고 도미티아누스에게 반기를  들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몇 가지 경우를 유추해볼 수 있다. 첫째, 황제의 독재 통치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은  도미티아누스에게 반감을 품은 원로원 의원들이 부추긴 게 아닐까. 둘째, 다키아 전쟁에 전념하고 있는 도미티아누스의 허를 찌를 속셈이었던 게 아닐까. 셋째, 이 무렵 제국 동방에 네로 황제를 자칭하는 인물이 나타났기 때문이 아닐까. 그 사내는 파르티아에 가서, 자기를 앞세워  로마에 대한 군사행동을 일으키라고 권했다. 그렇게 되면 도미티아누스는 도나우 강하류의 다키아족만이 아니라 유프라테스 강하류의 다키아족만이 아니라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강대국 파르티아에 대해서도 시급히 대응책을  강구해야 할 테니까. 그 틈에 서방에서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반란의 불길을 댕기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제7권에서도 말했듯이 네로가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평화를 확립했기 때문에 파르티아 국왕은 네로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전통적으로 로마의 가상적국인 파르티아가 로마에 반대하여 일어날 마음이 있다면,  네로 황제를 내세우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효력을 갖고 있었다. 제국 서방에서는 원로원과 시민만이 아니라 군단까지도 네로에게 등을 돌렸고 결국 네로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지만,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여  동방에 평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오리엔트에서는 네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국왕은 바뀌었어도, 파르티아는 로마와의 우호관계를 깰 뜻이 없었다.  도미티아누스의 요청에 따라 가짜 네로는 시리아 속주 총독에게 인계되었다.  물론 그 사내는 당장 처형되었다.
  따라서 파르티아가 가짜 네로를 옹립하여 로마에 반기를 들리라 믿고 반란의 불길을 댕겼다면, 사투르니누스는 상황을 잘못 판단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미티아누스와 동년배인 타키투스도 "파르티아 왕국은 네로  황제를 자칭하는 가짜를 내세워 로마에  반기를 들려했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간단히 해결된  사건이지만 일시적으로나마 로마인의 간담이 서늘해졌던 모양이다. 그리고 가짜 네로 사건과 마찬가지로 고지 게르마니아에서 일어난 반란도 간단히 처리되었다.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사투르니누스가 휘하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를 자칭한 것은 서기 89년 1월 12일이었다. 도미티아누스는 당장 에스파냐에  주둔해 있는 제7군단장 트라야누스에게 병력을 이끌고 마인츠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남아 있는 근위병만 이끌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황제도 트라야누스도 그렇게 서둘러  달려갈 필요는 없었다.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막시무스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본과 코블렌츠의 중간 지점에서 사투르니누스파 병사들을 무찔렀기 때문이다. 1월 25일에는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다.  사투르니누스는 자결했고, 그를 황제로 추대했던  병사들은 자신들의 경거망동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다. 내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유혈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뒤에 마인츠에 도착한 도미티아누스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처음 겪은 반란이었다. 자결하기 전에 사투르니누스는 남에게 누를 끼칠 위험이 있는 서류를 모두 불태워버렸지만, 도미티아누스의 분노는 격렬했다. 사투르니누스의 야욕에 공모자가 된 군단 장교들 중에서 여러  명이 처형되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에스파냐에서 갈리아를 가로질러 도착한 트라야누스를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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