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 - 임어당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이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지 정의가 있다.
첫째,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
둘째, 위장과 억센 근육과 호기심이 있다.
이것은 자명한 진실이다. 이것을 부정하고서는 인간과 그가 만들어낸 문명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왕이든 거지든 그들에게는 주어진 육체와 수명이 있다. 그로 인하여 모든 노래와 철학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사실 그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가 나를 낳는 이치와 같다. 그것만으로 완전하다는 기분이 든다. 속담에 '만석지기 땅이 있을지라도 다섯 척 평상에서 잔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 면에 있어서는 제왕 부럽지 않은 것이다. 또 수명은 돈으로 살 수 없다. 무소불위의 진시황제도 주어진 삶 외에 달리 사는 도리는 없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손님일 뿐이다. 누구나 이 지상의 나그네로서 씨를 뿌려 수확을 거두는 농부가 될 수 있고 땅의 소유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주라든지 주인이라든지 하며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은 참으로 괘씸하다. 세상에는 진정으로 집을 소유하는 사람도 없고 논밭을 소유하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시인 은 이렇게 읊었다.
황금 같은 산기슭의 옥토여!
새로 온 자 남이 가꾼 곡식을 거둔다.
그러나 기뻐하지 말라. 새로 온 자여.
그대 뒤에서, 또 남이 기다린다.
우리들은 죽음의 평등을 즐겨야만 한다. 죽음이 없다면 나폴레옹에게 있어 세인트 헬레나 섬조차도 시시한 곳이 될 것이며, 유럽의 번영된 오늘은 상상할 수 없게 된다. 하물며 영웅이며 정복자가 어찌 존재할 것인가. 우리는 위인이나 영웅들을 관대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들처럼 위대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황혼녘의 강에 조각배를 띄우고, 흘러가는 그 배 안에서 꾸는 꿈에 불과하다. 꽃은 피었다 지고 달은 차다 기울며, 인간의 목숨도 고고성과 함께 시작되어 세월에 따라 성장하다가 결국에는 뒷사람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간다. 이런 반복은 자연의 영원한 이치에 다름 아니다. 이런 깨달음이 없다면 우리들은 노래부를 수 없다. 애상에 젖을 수도 없으며 꿈을 꿀 수조차 없다.
우리들은 연극배우이다
중국의 철학자 유대성은 인간의 삶을 연극과도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기실 엉뚱한 야망이 그 진실을 왜곡하여 바라보게 할뿐이다. 다음은 편지는 그가 친구에게 보낸 글로써 인간의 참 삶에 대한 그의 식견이 절절하게 우러나 있는 글이다.
'모든 것들 중에서 우리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관리가 되려는 욕구이다. 그리고 가장 시시하게 여기는 것은 연극배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모두 어리석다. 무대의 배우들이 저마다 현실의 인간이라고 믿으면서도 노래하고, 울고, 서로 욕하고, 농담하는 장면을 나는 본적이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연출되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인물로 분장하는 배우 자신들의 것이다. 그들은 모두 부모와 처자가 있으며, 그들을 부양하고 싶어한다. 그 때문에 웃고 욕하고 농담하면서 그 양식을 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자기들이 분장하려는 진짜 무대의 인물인 것이다. 배우들 중에는 관복을 입고 관리의 모자를 쓰면 자기가 진짜로 관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실제로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연극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연기를 하는 동안 굽신거리고, 조아리고, 자리에 앉고, 이야기하고, 주위를 응시하며, 아니 엄숙한 관리로 분장하고 그 앞에 죄인들이 떨고 있을 때조차, 자신이 노래하고 울고 웃고 욕하고 농담을 해서 부모의 처자를 부양해야만 하는 하찮은 배우에 불과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정말 자신의 창자와 본능적인 감정이 모조리 연극에 지배당할 때까지 자신의 실은 배우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어떤 연극, 어떤 배역, 어떤 대본, 어떤 대사의 억양이나 형태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다.'
왜 먹어야 하는가
인간이 동물임을 입증하는 가장 중대한 사실 중의 하나는 위장이라는 밑 빠진 독이 있다는 것이다. 쾌락주의 이립옹은 그의 저서 "식물편"의 머리말에서 인간에게 이 위장이 있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하고 있다.
'인체의 여러 기관, 귀, 눈, 코, 혀, 곤, 발, 몸통 등이 각기 필요한 기능이 있음은 익히 아는 바이다. 그런데 우리 몸에는 아무 필요도 없이 부여된 두 가지 기관이 있다. 그것은 입과 위장이다. 입과 위장이 있으므로 해서 인류는 탄생 이래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것이다. 이 입이 있고 이 위가 있으므로 먹어야 한다는 복잡한 문제가 새겼으며 인간 세상에 교활과 거짓과 위선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교활과 거짓과 위선이 나타나면 이를 다스릴 형법이 생겨난다. 그러면 왕은 어진 정치를 펴서 백성을 감싸줄 수가 없게 되며, 부모는 사랑을 베풀 수 없게 되고 만다. 이것은 인간을 만든 조물주의 선견지명이 모자란 결과이다. 왜 인간에게 입과 위장을 주었는가? 식물은 입과 위가 없어도 살 수 있고, 바위나 흙은 아무런 영양이 없어도 존재한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왜 입과 위라는 두 기관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꼭 필요한 것이라면 왜 물고기나 조개가 물에서 양분을 취하고 귀뚜라미나 매미가 이슬에서 취하듯 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은 다 이슬이나 물로 성장해서 정력을 얻고 헤엄치고 날고 뛰며 울고 있지 않는가. 만일 그랬다면 인간은 허덕이는 일도 없을 것이고 슬픔도 없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식욕이라는 욕망까지 주었다. 때문에 우리들의 커다란 독은 밑 빠진 것이라기보다는 영원히 채워지지 않은 골짜기나 바다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 두 기관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충분치는 않으나 다른 모든 기관이 있는 힘을 다해서 일을 해야 하게 되었다. 나는 이 문제를 거듭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조물주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도 이 사실에 대해서 후회했으리라 확신해마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설계나 견본이 모두 완성되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이것저것 비교해 생각해 보면 법률이나 제도를 제정할 때는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 위장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과소평가한다고 해도, 먹거리에 대한 욕망은 식욕과 성욕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용케 성욕을 극복한 사람은 많지만 식욕을 극복한 사람은 없었다. 어떤 정신적인 깨달음을 얻은 성자라 할지라도 음식을 거르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인간성에 대하여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다툼이나 언쟁이 재판소가 아닌 식당에서 해결되는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 때문이다. 성공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식사의 효과를 알아야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하나의 욕망의 입구이면서 출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상 생활의 면에서 좀더 확장시켜 말한다면, 혁명이나 평화, 전쟁, 애국심, 국제적 분쟁의 조정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가지고 있다. 저 유명한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의 주요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루소나 볼데르, 톨스토이가 아니라 먹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일찍이 '군대는 위장으로 싸운다'라고 부르짓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식욕이 충족되면 정신은 맑아지고 성욕이 생기며 문화를 그리워하게 된다. 향수니 뭐니 하는 것도 기실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에 먹었던 맛난 음식에 대한 추억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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