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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각오 - 마루야마 겐지

 


 타인의 삶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트집을 잡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 정직하게 털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체험 이나 행동의 범주를 넘어서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설령 소설가라 해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두고 내 소년 시절 얘 기를 쓰기로 하자.
 되바라진 아이였다. 툭하면 어른들의 얘기에 끼어들었으며, 징글 맞도록 붙임성이 좋았고, 너스레도 잘 떨었다. 그런 주제에 성미가 급해 한 번 성질을 부렸다 하면 부모님도 속수무책일 정도로 난동을 피웠다. 또 노력하기는 싫어하면서 폼잡기는 좋아하였고, 무슨일이든 끝마무리가 엉성했다. 그리고 주특기는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이었다. 터무니없는 공상벽이 있어 나 스스로도 넌덜머리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렇게 넌덜머리가 날 때면 현실이 똑바로 보이고, 가슴속으로 허망한 바람이 휑하니 부는가 싶으면 금방 실망이란 회오리바람에 휘말리기가 일쑤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이런 일이 있었다. 아버지는 근무처인 학교에서 할당해준 밭-식량난 때문에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을 갈고 있었다. 여름이었다고 기억한다. 그 무렵의 생활상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데.그날 그 순간의 일만은 기억에 생생하다. 아버지는 진짜 농부처럼 익숙한 손놀림으로 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잡초 더미에 뒹굴면서 그런 아버지를 구경하고 있었다. 눈앞에는 파란 도깨비부채가 피어 있었다. 조건은 그것뿐이다. 아버지한테 신나게 혼이 난 다음도 아니고  감기에 걸렸던 것도 아니다. 하늘이 어둡게 구름져 있었던 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기분이 들 만한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묵묵히 괭이질을 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내 가슴에 돌연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뻥"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그러자 그 구멍으로 싸늘하고 허망한 바람이 휑하니 불어와,혹 이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닌가-구체적인 말을 아니었지만-하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현실 그 자체이며,나도 어른이 되면 저런 식으로밖에 살아가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성장함에 따라 현실의 비참함을 볼 기회가 점차 많아졌다. 인간이란 참으로 별볼일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굳어졌고 그럴 수록 내 가슴속의 구멍은 넓어졌다. 나는 점점 더 꿈속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서는 생각만 해도 온몸의 피가 들끓는 행동적인 모험으로 돌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안정되고 일상적인 생활을 송두리째 배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 힘도 없는 어린애인 나는 그런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해야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산에 올라가 막대기를 휘두르며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핑핑 뛰어다니거나 비탈진 낭떠러지를 날쌔게 기어올라갔다. 머릿속으로는 타잔이나 로빈 훗의 용감한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밤이 되면 이불 속에 파고들어 가 영웅들의 터무니없는 활약상을 꿈속으로 반입하는 정도였다.
 내가 바란 것은 자유와 변화였을 것이다. 넘쳐흐를 정도의 자유와 격렬한 변화. 이를테면 그림으로 그린 듯 반듯한 정의의 깃발 아래, 마음에 들지 않는 치들을-그게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는 짐작도 못 했지만-전부 죽여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증오의 대상인 가상의 적이 필요했는데,행동 범위가 극단적으로 좁은 아이였던 나로서는 아무리 찾아도 그 대상을 설정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오로지 일본은 패전국이며, 더구나 그 모든 책임이 일본에 있고, 나쁜 것도 일본이라는 반복뿐이었다. 폭력적인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쟁을 경험한 어른들은 평화라는 두 글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평범하고 안정된 길을 향하여 쉬지 않고 일했다. 혹시 그들이 전쟁중에 태어난 우리 세대에 폭력적인 여운을 남긴 것은 아닐까. 일본이 미국에 내몰리는 순간.천황이 패배를 인정한 순간,당시 어른들과 청년들.그리고 철이 든 어린이들은 돌변이란 말로 표현해도 좋을 만큼 재빠르게 사상 전환에 성공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모르는, 아니 산 너머 세계에 뭐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세대는 의식의 저변에 아주 폭력적인 피를 남기게 된 것 아닐까.
 그 세대는 학생운동만 해도 아주 거칠고 피비린내 나고 전투적인 방식을 취했다. 하기야 대학생활과는 인연이 없었던 나한테는 그들이 일으킨 소동이 아주 사치스럽고 아주 흥미로운 혁명놀이에 불과해 보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상의 흐름은 평화와 번영의 방향으로 기세등등하게 흘러갔고, 끝내는 모든 사람들이 침묵과 무시정도의 반항밖에 하지 못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그런 반항조차 깨끗이 단념하고 세상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든 잘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부모와 시대로부터 폭력적인 피 를 이어받지 못했다. 포식의 시대와 행복한 가정을 당연시하는 환경에서 자란 탓에 애당초 거역을 모른다.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신나게 놀고 안이한 상냥함을 유일한 안식처로 삼는, 뭐라 말할 수 없이 기분 나쁜 인종이 되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수중에 넣을 수 있는, 현실적이라면 너무도 현실적인 꿈밖에 추구하지 않는 여자의 삶 그대로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러쿵저러쿵 할 권리가 없다는, 짐짓 도라도 닦은 듯한 말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진드기 같은 평론가는 아니므로, 최대공약수적인 의견은 토로하지 않는다. 거부를 당할지언정,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매도를 당할지언 정,나는 아무 상관 없이 말한다. 하고 싶은 말은 딱 부러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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