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 - 사만타 글렌, 메리 페사레시
레일라 이모
레일라 이모는 오페라 가수였다. 23살에 맨해튼 오페라 하우스에서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짜역으로 데뷔한 메조 소프라노 가수. 이모는 우리 가족 모두가 자랑스러워 하는 매력적이고 자유분방한 보헤미안이었다. 이모는 늘 흑단처럼 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빗어넘겨 목덜미에 단아하게 묶었다. 언제나 여왕처럼 우아하게 걸었고 우리들이 우중충한 겨울 코트로 몸을 칭칭 두르고 다닐 때에도 부드럽게 하늘거리는 망토를 걸치고 다녔다. 레일라 이모 주변에는 그녀의 초록색 눈과 흰 눈 같은 피부에 반한 화가들로 들끓었다. 그들의 작품에는 한결같이 레일라 이모의 이미지들이 흘러넘쳤다. 자식이 없던 이모는 조카인 우리들을 더욱 귀여워 했다. 언니, 오빠와 함께 이모 집으로 놀러가는 것은 아주 특별한 행사였다. 이모는 우리를 온갖 파티장으로 연극공연장 그리고 오페라하우스로 종횡무진 끌고다녔다. 그것이 이모 방식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일이었다. 밤이고 낮이고 상관하지 않았다. 애들은 일정한 시간에 재워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도 이모 머리 속에는 아예 없었다. 그런 날 저녁은 늘 브로드 웨이에서 막을 내렸다. 당시는 1940년대였다. 브로드웨이의 윗동네에는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거리가 펼쳐져 있었다. 거리 양옆으로는 그곳을 살아숨쉬게 하는 아름다운 카페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모는 카페에까지 우리를 끌고 갔다. 내 어린 눈에 담배 연기 자욱한 어른들의 세계는 몹시도 신기하게 비춰졌다. 잔뜩 우수에 잠겨 예술가 티가 줄줄 흐르는 어른들이 위스키로 만든 맨해튼 칵테일이나 진한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즉석 토론을 벌여댔다. 이국적 향내가 나는 시가를 유럽 사람들처럼 손바닥을 동그랗게 오므려 잡고 피우면서 말이다. 이모는 그 토론장에서도 단연 분위기를 주도하는 사람이었다. 내일이라도 생을 마감할 것처럼 염세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힌 사람도 이모와 한 마디만 하고 나면 금세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독자 하나없는 무명 작가들에게도 이모는 큰 힘이 돼 주었다. "당신의 글 속에는 사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보석같은 힘이 있어요." 성미 급한 어느 작가는 이모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두말할 것도 없이 글을 쓰러 가기 위해서였다. 이모는 정말 사람들이 저마다 하나씩 갖고 있기 마련인 장점과 긍정성을 정확하게 볼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하나부터 열까지 그 거리는 내가 살던 뉴저지와는 딴판이었다. 낯설고도 신비로운 그 거리가 내게는 바로 별천지였다. 이모와 함께 밤늦게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나는 늘 무언가에 홀린 눈으로 이모에게 말하곤 했다. "이모는 정말 멋있어요." "뭐가 말이니?" "음......, 아무튼 멋있어요. 나도 이모 같이 됐으면 좋겠어." 이모의 아파트는 허드슨 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그 동네에는 음악가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봄에 이모의 까만 스코티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있노라면 활짝 열린 창문 안에서 낮게, 높게, 웅장하게, 가냘프게, 시시각각 달라지는 성악가들의 발성연습 소리가 퍼져 나왔다. 간간이 피아노와 바이올린음도 그 소리에 섞여 나른한 오후의 햇살 속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레일라 이모의 세상이었다. 음악과 예술이 살아 숨쉬는 세계, 유행이 아니라 개성으로 패션의 기준을 삼는 세계, 자유로운 사고가 새처럼 날아 다니는 세계..., 그 세계는 이제 막 십대에 접어든 나에게는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나 나는 이모와는 종류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14살짜리 못생긴 계집애에 불과했다. 적어도 내가 평가하는 내 자신은 그랬다. 어깨만 구부리면 세상에서 흔적 없이 꺼져 버릴 수 있다고 여겼는지 늘 구부정하게 움츠리고 다녔다. 도대체 내 얼굴 숨구멍 하나 하나까지 샅샅이 살펴봐도 제대로 된 구석을 찾을 수 없었다. 거울은 증오스런 나의 적이었다. 나는 평생을 미운 오리 새끼로 살아갈 내 신세가 한없이 절망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푹푹 새어나왔고, 도대체 어디에도 희망은 없어 보였다. 이모를 조금만 닮았다면, 털끝만큼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다면 내 인생도 달라질 수 있을 텐데.... 시모나, 너처럼 매력없는 인간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꺼야.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 너라면 너같은 애를 사랑할 수 있겠니? 그날도 나는 자기 혐오와 연민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오후 내내 침대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소란한 기척이 들려왔다. 레일라 이모가 온 모양이었다. 나는 이모를 반갑게 맞이하고 싶었지만 너무 우울해서 그냥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어머니와 이모는 이층 거실로 올라와 차를 마셨다. 거실은 내 침실 바로 옆에 있었다. 그래서 전혀 의도한 바도 없었는데 나는 빼꼼히 열린 문틈으로 들려오는 어머니와 이모의 대화를 엳듣게 되었다. 어떤 대목이었을까. 갑자기 나팔 소리처럼 커진 이모의 목소리가 또렸하게 내 귀에 들려왔다. "언니, 시모나 말이야. 걘 어쩌면 그렇게 눈이 아름다운지 모르겠어. 뭔가에 집중할 때 보면 밝고 영롱한 게 정말 매력적이야." 아름답다..., 아름답다고? 내몸에 매력적인 구석이 있다고? 설마, 그럴 리가...,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거울 안에는 매일 아침마다 봐 왔던 깊은 갈색 눈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예전과는 다른 것도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내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것이 아몬드 모양에다가 금빛 가루를 살짝 입혀놓은 것도 같았다. 눈동자 속에도 뭔가 열정적인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갑자기 아름답게 변한 내 눈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위해 고개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전에는 한번도 느끼지 못했는데 내 눈이 꽤, 예뻐 보였다. 레일라 이모의 그 말 한마디는 그 뒤, 내가 성장하여 체형이 잡힐 때까지 나의 버팀목이 되었다. 미운 오리 새끼는 이윽고 백조가 된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이모는 내가 얼마나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부끄러워 했는지를 알았던 거 같다. 그렇다고 이모가 한 말 때문에 갑자기 내 몸 전체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모의 그 말에 힘입어 적어도 몇 년은 당당히 버틸 수 있을만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사람에게 관심을 쏟는 가장 선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남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레일라 이모는 민감한 사춘기 시절을 보내던 내게 아주 소중한 선물을 안겨 주었다. 그 선물은 바로 사랑의 눈을 통해 나를 바라본 결과였다. - 시모나 시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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