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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1 15:01

요즘 사는 이야기

조회 수 13237 추천 수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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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는 이야기

얼마나 길렀는지 기억엔 없다. 허리띠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잘랐다. 거울을 보니 훈련소 들어가기 전 부대 앞 이발소에서 깎았던 짧은 머리모양이 생각났다. 노래 가사처럼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앞뒤로 손을 대어 비벼보니 벌거벗은 느낌과 시원하다는 느낌이 함께 느껴졌다. 이발소 주인은 한 번에 자른 나의 긴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세 곳을 묶어 미용기구들이 있는 한편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저 긴 머리카락을 아마 어디에 팔아버릴 모양이다. 구겨진 천 원짜리 몇 장으로 값을 치르고 가방을 메고 이발소를 나섰다. 2월의 첫날은 그렇게 춥게 시작됐다.

가방 속 수북한 이력서들을 전단지 돌리듯 오늘 모조리 돌릴 것이다. 회사라는 조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지금 이력서 뭉치를 들고 걷는 마음은 날씨보다 추웠다. 10년간의 골방생활을 접은 이유를 핑계 대자면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하객을 모시고 성당을 찾았고 20분 만에 혼인성사는 끝났다. 촛불 하나 두고 홀로 이불을 싸매며 겨울을 날 수는 없다. 홀로 굶을 수도 없다. 혼자가 아닌 둘이었다. 나는 일거리가 필요해졌다. 누런 책들을 뒤져가며 문사철을 씹어대는 재미는 사치에 불과했고 밤을 새워가며 몇 자 끼적인다고 돈이 되지도 않았다. 나는 소설은 돈이 될 것이다 믿었다. 그러나 돈을 향한 소설을 시작하기보단 쌀통을 채우는 것이 급했다. 나는 내 짝지에게 예쁜 액세서리도, 꽃도, 결이 좋은 옷도 사주고 싶었다. 내 너 하나만은 굶기지 않을 것이다 마음먹고 원고들 인쇄할 잉크로 이력서를 뽑아냈다.

체계도 잡혀있지 않고 동네 구멍가게만도 못한 행정력, 무엇하나 믿음 가지 않는 새로 생긴 건설회사에 들어가 회사의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들이 필요한 허가증, 주주정리, 4대보험, 직원 채용 등 발 빠르게 일했다. 한 달쯤 지나니 회사의 윤곽이 나오고 홈페이지만 만들면 얼추 기초는 끝나는 듯 보였다. 호스팅업체를 알아보던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올라오니 부회장이라는 사람이 나를 따로 불렀다.

“윤 과장. 그동안 수고했네. 이런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미안한 마음부터 드네.”

문득 이용당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중대사들이 끝났으니 그만 두라는 말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 사람 말고는 출근한 남자 직원이 없었다.

“미리 말씀해주시지 갑자기 이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하지요.”
“미안하네. 그렇게 됐네.”
“뭐가 그렇게 됐는데요? 이젠 쓸모가 없어졌나 보군요.”

내게 뭐라 말은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 일어나 짐을 쌌다. 내 자리까지 와서 뭐라 떠들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도 일었고 내가 너무 순진했나 하는 후회도 일었다. 여직원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2인의 단막극을 보고 있었다. 부회장은 한 달 치 봉급이 들어있는 봉투를 내게 건넸다.

어쩌면 몸을 쓰는 일이 더 나을 거다. 땀을 흘리는 일을 알아보자. 땀은 그만큼의 대가를 주지 않겠나. 그날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아내에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또다시 일거리를 구해야한다는 강박증이 머리를 흔들고 있는데 눈앞에 흉가가 하나 보였다. 내가 사는 연립이 흉가로 변해있었다. 3층과 4층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 직전이었다. 집주인에게 무슨 일인지 전화를 걸었다. 집주인이 바뀌었다며 새로운 집주인과 통화해보라 말하기에 새로운 집주인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보니 구조 변경을 하는 중이니 집을 비워달라 했다. 아직 날씨는 풀리지 않았다.

이력서를 들고 다니며 부동산 사무실도 돌아다녔다. 쉽게 방을 구할 수 없었다. 높은 월세를 원했고 월세가 괜찮다 싶으면 보증금이 높았다. 무직자 꼴에 누울 방마저 사라질 판이었다. 면접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당했다. 2~30대를 원한다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거래처 납품을 해야 하는 데 제가 다리를 다쳐서 운전을 못하고 있습니다. 조수석에 제가 타고 안내를 해드릴 테니 대신 운전 좀 해주실 수 있나요?”

4일을 일하고 그만 두었다. 개만도 못한 취급에 버티기 힘들었다. 일당도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사람이 당하지 말아야 할 것을 4일간 모조리 겪었다. 내가 운이 이리도 없는 놈이었나 자괴감이 들었다.

와중에 이사를 했다. 집이 부서지기 전에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빛은 들어오지 않아도 조용한 방이다. 묵묵히 짐을 내리다 끝없이 트럭에서 내려오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책들이 미웠다. 책들이 혐오스러웠다. 저것들이 내게 뭔가. 이삿짐의 반이 책이다. 나는 불살라버리고 싶었다. 울화가 치밀었고 휘발유를 사오고 싶었다. 모조리 태워버리고 싶었다. 책보단 돈이 내 철학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내게 지금 필요한 건 돈이지 저런 종이쓰레기가 아니다. 대낮에 소주가 끝없이 들어갔다. 내 30대를 저 책들이 가져갔다. 푼돈만 생겨도 책을 샀다. 라면과 책을 바꾸던 날도 기억난다. 헌책방에서 눌러앉아 졸던 생각도 난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책이 들어있는 박스는 풀지 않았다.

며칠 전 성당으로 가는 길에 얼굴에 화상을 입은 어르신이 보였다. 선글라스로 가리고 있었지만 충분히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리어카를 끌며 폐지를 줍고 계셨다. 어르신을 불러 나와 같이 가자고 했다. 버릴까 말까 갈등이 이는 책은 모조리 버렸다. 차마 버릴 수 없는 책들도 있었다. 나를 기억해주고 내 이름 석 자를 적어 선물로 보내준 책은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어르신은 연거푸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있었고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고물상에서 책의 가치는 Kg이다. 묘한 감정이 일었다. 손때 묻은 情들이 세시간만에 모두 사라졌다. 방이 넓어졌다.

빈 소주병들을 버리러 가는 길에 새 순이 돋은 나뭇가지를 봤다.

‘넌 순리대로 사는 구나. 푸른 잎들로 그간 앙상했던 가지위에 옷을 입겠지. 올 한 해도 조금 더 커지겠구나. 꽃도 피울 생각이니? 손대지 않을 테니 예쁘게 너를 꾸며보렴.’

구름 한 점 없다. 봄바람은 선하고 양기가 대기를 채우고 있다. 구인광고를 기웃거리는 거 보면 살고는 싶은 모양인데 답답하다. 언제나 할 말이 많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늘 꾸물거린다. 버리지 않던 꿈이 사그라진다. 공허하다. 뜨겁게 달궈진 다리미판이 가슴을 꾸욱 누르는 것만 같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싱글싱글 웃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싶어도 집안의 해를 보면 힘이 솟는다. 별 볼일 없는 가난한 사람 찾아 온 안해 아니던가. 세상 팍팍하게 변했음을 체험했다면 내가 들어가 조금이나마 풀어내면 되지 않겠나. 수많은 사람 사는 세상이 어찌 모두 한통속이겠나. 좋은 인연도 있겠지. 주먹 따위 불끈 쥘 필요 없다. 저 새순 틔우는 나뭇가지처럼 순리대로 살면 되지 않겠나하며 허허댄다.

프린터가 가래 섞인 소리로 이력서를 뱉어내고 있던 어느 날, 오랜만에 사는 이야기 몇 자 적어 본다.

오늘문득 - 2012.03.21. 14:47 윤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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