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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길(1920. 11. 15 충북 충주~.)

철학자.

1947년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 법학부를 중퇴한 뒤 귀국하여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60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6년 건국대학교 부교수, 1961년 연세대학교 문리대학 부교수를 역임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철학과 부교수가 되었다. 1974년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학장과 한국철학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987년 서울대학교를 퇴직한 후 명예교수가 되었다.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윤리학〉·〈윤리학개론〉·〈소설에 나타난 한국인의 가치관〉·〈새인간상의 기초〉·〈듀이의 사회철학〉·〈변혁시대의 사회철학〉 등이 있다.


    글을 쓴다는 것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 무언 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하게 실천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것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반성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을 어떤 형식으로든 거짓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장래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을 가라앉힘으로써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이기도 한다. 만일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이 있거든 그것을 종이 위에 적어 보라. 다음 순간, 그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은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 떠오르고,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막거니 간섭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이나 매명을 위한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한 것이요, 간혹 자기와 절실히 가까운 벗을 독자로 예상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본래 저속한 이해와는 관계가 없는 풍류가들의 예술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상한 취미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모든 진실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을 속임 없이 솔직하게 그린 글에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까운 벗에게 보인다. 벗도 칭찬을 한다.  "이만하면 어디다 발표해도 손색이 없겠다."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과 격려를 듣고도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트 한구석에 적었던 글을 원고 용지에 옮기고 그것을 어느 잡지사에 보내기로 용기를 낸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길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면서, 활자의 매력에 휘감기고 마는 것이다. 잡지나 신문은 항상 필자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두 번 글을 발표한 사람들의 이름은 곧 기자들의 수첩에 등록된다. 조만간 청탁서가 날아오고 기자의 방문을 받는다. 자진 투고자로부터 청탁을 받는 신분으로의 변화는 결코 불쾌한 체험이 아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하고, 정성을 다하여 원고를 만들어 보낸다. 청탁을 받는 일이 점차 잦아진다. 이젠 글을 씀으로써 자아가 안으로 정돈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밖으로 흐트러짐을 깨닫는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정열에 못 이겨 종이 위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눌려 짜낸다. 자연히 글의 질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 써야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길을 내 집까지 찾아온 사람에 대한 인사를 생각하고, 내가 과거에 진 신세를 생각하며, 또는 청탁을 전문으로 삼는 기자의 말솜씨에 넘어가다 보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쓰겠다고 한번 말만 떨어뜨리고 나면 곧 채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돈빚에 몰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글빚에 몰리는 사람의 괴로운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나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하나의 고역으로 전락한다.

  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 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흐를 때, 그 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 붓을 들면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없이 성실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의 사실을 전체의 사실처럼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에서 흔히 발견된다. 자극을 갈망하는 독자나 신기한 것을 환영하는 독자의 심리에 영합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의 허세로써 자신을 과시하는 일이다. 현학적 표현은 사상의 유치함을 입증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스러움을 증명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