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 치르던 날 - 윤영환

by 風文 posted Apr 3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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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 치르던 날

 

 

몇만 원이 손에 쥐어져 한 가지 생각에

멍한 눈으로 쫓기듯 밖을 나서 노 씨 아주머니 가게로 튄다

과자들이 바람에 빨려오란 듯이 문을 열고 들어서

입술의 양 끝을 내려 거만하게 외상값을 치르고

따지러 가듯 냉장고로 성큼성큼, 소주 두 병을 들고

그 자리에서 한 병을 잡고 뚜껑을 딴다

골든벨 울리듯 우쭐한 어깨로

삿대질을 해대며 담뱃갑들을 가리킨다.

노 씨 아주머니 귀가 입에 걸렸다

그 찰나는 나에게 최대행복의 순간이며

소주와 담배를 들고 가게 문을 나서는 순간은 늘 광복이다

즐김이며 또한 내 작품의 숨 쉬는 스냅사진이리

 

반으로 찌그러져 피다 만 굽은 꽁초들이

목봉 체조하듯 나란히 줄을 서면

뺑돌이 의자에 앉은 사장처럼 멋지게 더럽다

술 한 컵 털어 넣고 일그러진 꽁초를

새색시 만지듯 한 개비 집어 들어

덜덜거리는 손으로 입에 처넣고 불을 댕기면

독하디독한 것이 스테이크 저리 가란 듯 안주로 숨 쉰다

타들어 가는 것이 꽁초가 아닌 내 속일지언정

오늘의 술과 담배는

부처의 극락이며 모세가 열어 보인 바닷길 일터

다음날이 외상의 재시작이니

오늘만이라도 황제로 살아보려 애를 써봄이다.

 

 

 

詩時 : 2004.12.13 07:26 風磬 윤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