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 (酒酊) - 윤영환

by 風文 posted Apr 30,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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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 (酒酊)

 

봄을 노래하면 여름을 기다리나보다 합니다

봄을 봤다면 봄을 노래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당신의 봄노래를 들어야만 봄인 줄 아는 사람 없거든요

 

사랑을 노래하면 외로워하나 보다 합니다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은 이미 식었거나 떠났을 테니까요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사랑을 하는 사람은 차분히 앉아 사랑을 써 내릴 시간이 없답니다

 

효도를 말하면 그 사람 측은해 보여요

살아계실 때 섬기지 못했거나 지금 효도한다고 쇼하는 것입니다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울 아버지 가시고 나서야 효도가 입버릇 돼버렸으니까요

 

이슬비에 옷 젖어 화내는 사람 없어요

각오하고 걸어왔거든요

소나기 맞고 옷 젖으면 화내죠

비 맞을 각오 안 했거든요

 

당연한 것들과 남들 다 아는 것을 노래하고 싶지 않아요

침묵 속에 자연스레 흘러야 하는 것들을 들추고 싶지 않거든요

지난해 담근 김장김치 냄새나는 단어들을 찾고 있어요

살아온 경험에 그것이 사는 냄새라고 믿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정한 원고 마감 시간에 맞추느라

쉽게 맛을 잃어버리는 겉절이만 불러대요

우겨도 소용없어요

나는 알거든요

냄새만 맡아도 어떤 김치를 먹었는지 알거든요

 

주정이 난 참 싫어요

지난해 담근 김장김치랑 겉절이랑 섞어 부르거든요

우길 수 없겠네요

나는 알거든요

술이 들어가야 쓰니까.

 

 

 

 

 

 

 

 

 

윤영환風磬 : 2006.04.30 06:38 詩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