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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5 00:24

70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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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

“7,002,885,627”
2011년 11월 15일 00:03분 쯤 세계 인구다.(http://www.worldometers.info)
70억이든 999억이든 각자 산다.

그건 그렇고,

뛰어난 화가에게 어제 봤던 붉은 노을 그려 달라고 부탁해봐야 내가 봤던 붉은 노을을 그릴 수 있는 화가는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에 존재하는 카메라 중 가장 비싼 카메라로 찍어봐야 어제 본 내 붉은 노을은 찍지 못한다. 그 카메라를 내가 직접 들고 찍어도 내가 본 순간은 찍지 못한다. 그 노을은 셔터를 누르기 전에 이미 이루어진 노을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시각정보가 뇌로 오는 시간과 셔터를 누른 후 영상이 입력되는 시간은 각각 존재한다. 참으로 내가 본 붉은 노을은 내 눈 말고는 입력이 불가능하고 훗날 아무리 자세히 말해도 재현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 찍힌 노을은 정말 그 시간에 찍힌 걸까? 셔터가 신호를 보내고 렌즈가 영상을 담는 찰나의 노력은 인간과학으론 참 볼만하지만 사실 그렇지 못하다. 나노기술이 카메라에 적용 되어도 그때 그 장면을 인간이 촬영하는 건 불가능 하다.그렇다면 동영상은 어떤가? 더욱 불가능하다. 프레임의 원리 때문이다. 자연을 고스란히 담는 카메라는 지구엔 존재하지 않는다. 초고속카메라라면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역시불가능하다.

그건 그렇고,

10억 명이 붉은 노을을 같이 봤다면 그들이 바라본 붉은 노을이 10억 명 모두 일치할까? 아니, 본 그대로 표현은 가능할까? “인간은 언어로 자연을 표현할 수 없다.” ‘늘 푸른 소나무’라는 말은 이해하지만 구체적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다르다. 10억 명이 한그루의 소나무를 똑같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그 소나무 한그루를 본 사람이 A4용지 수 만 장 또는 그 이상으로 글로 표현해도 읽는 이는 글쓴이와 공감할 수 있겠나? 눈과 흡사하게 사물을 보는 카메라는 있어도 눈과 똑같이 보는 카메라는 지구엔 없다. 70억 명이든 999억 명이든 모두 다르게 자연을 보고 산다. 짜릿하지 않나?

그건 그렇고,

나와 당신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가 곯아가고 있다. 너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다르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사회를 맞이하고 있다. 내 뜻대로 이루어져야 만족하는 방송, 언론, 단체, 개인이 득실득실하다. 70억 명이 사상이 같으면 동물이지 인간인가. 대한민국인구는 이미 5천만 명이 넘었다. 5천만의 생각을 존중 없이 자기의 뜻을 기준으로 잡으려고만 하고 내 뜻과 반대라는 이유로 남을 죽이는 인간은 스스로 죽어야 마땅하다. 내가 바라지 않아도 늘 역사는 그런 인간의 파멸을 철저히 기록해왔다.

그건 그렇고,

아름다운 길은 뭔가? 행복이 다다. 정치하는 인간들의 눈이 외눈이면 힘든 사람들은 정치를 하지 않는 국민들뿐이다. 왜냐면 정치하는 자들은 노후가 보장되어 남이 욕을 하든 말든 편히 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이 정치판을 흔들고 있고 윗놈이 민본을 세우지 않아도 아래서 민본이 들고 일어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격정기다.
언젠가 힘들게 사는 퇴역 국회의원이 TV에 나온 때가 있다. 현역에서 물러난 국회의원들의 연금을 올린 사실로 여론이 들끓었다. 불쌍하게 사는 늙은 전직 국회의원을 보여 준 방송분인데 구역질이 났다. 나보다 잘살았다. 나의 서너 배는 더 잘살았다. 저 정도로 노후를 살면 나는 원이 없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전직 국회의원의 김치와 한두 가지뿐인 반찬? 참으로 웃기지 않나? 나는 그 방송 볼 때 쌀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난 지금 배는 곯지 않는다. 그럼 배 채우고 남은 건 어떻게 하지? 70억 명 중 배를 못 채운 사람에게 주면 된다. 더 좁은 우리 안에서 나누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우리 동네에서 나누면 된다. 모두 나누는 일은 어렵다. 당장 내가 또 고프니까. 굶는 사람보다 굶지 않는 사람이 더 많으니 굶지 않는 사람들이 조금 덜어 모으면 된다. 이를 실천 하고 있는가가 우리들이 앞으로 고민할 ‘삶일’이다. 당신은 실천하고 있는가가 나의 물음이며 나는 실천하고 있는가가 내 양심의 물음이다. 답은 천편일률일 것이다. 단, 文章의 패와 패가 나뉠 뿐이지 70억 개의 문장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누구나 자신을 상심케 한 사람 또는 얼마 전 나를 슬프게 한 사람, 정을 주거나 믿었는데 떠나거나 배신한 사람을 떠올려보면 답답할 게다. 그러나 장시간 철학해보면 그 서운함이나 배신감 그리고 슬픔은 나의 생각일 뿐임을 알게다. 그들은 나와 똑같이 아파하지 못한다. “절대로”. 70억 명이 70억 개의 감정을 갖고 살고 있다는 걸 모르면 70억 개의 슬픔이 한 번에 내게 밀려온다. 그러나 긍정의 힘은 70억 명을 동시에 웃길 수 있다. 슬픔, 괴로움, 억울함처럼 아픈 감정은 70억 명이 공감 못하지만 평화, 사랑, 미소, 즐거움, 행복, 아늑함, 만족처럼 본능이 원하는 행복을 향한 감정은 70억 명이 충분히 공감가능하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는데 “내가 줄 때만 가능하다.” 중요한 사실을 하나 말해본다. 흔히들 좋은 언행보다 나쁜 언행에 빠지기 쉽다고 말한다. 객관적 사실이다. 그러나 70억 명 모두가 슬픔을 전달하는 것보다 70억 명 모두가 미소를 전달하는 일이 더 빠름을 확신한다. 미소는 슬픔을 씹어 먹는다. 살면서 울다가 웃는 경우는 있는데 웃다가 우는 경우는 거의 없음을 인정하자. 이를 구비문학적으로 말해보면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이 난데요!”라는 아이들의 음률이 있으나 반대로 웃다가 울면 어디에 뭐가 난다는 이야기는 없다. 미소는 울음을 멈추게 하며 반드시 2인 이상이 같은 공간에 있어야만 한다. 뭐 요즘은 홀로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울다가 웃는 사람들도 많다지만 그래도 미소는 눈물을 이긴다고 믿는다.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70억 명이 동시에 웃는 일은 가능한가? 불가능할까? 우는 사람들에게 미소와 희망을 줘야하는 책임이 있기에 늘 우는 사람은 존재해야만 한다? 맞는 말이다. 반드시 우는 사람,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이 존재해야만 한다. 영육으로 모든 사람들이 풍족하고 평화롭다면 나눔이란 단어도 평화라는 단어도 의미가 없다. “인간은 울고 웃는 감정의 동물이다?” <- 울거나 웃지 않으면 인간이 아닌가? 그 중간은 뉴스에는 없는 겐가? 낡은 문장 같아 보인다.늘 우는 사람은 드물어도 늘 웃는 사람은 있다. 병신이 그렇다.(내가 존경하는 병신도 있다.) 정신병자만 늘 웃는다. 무표정, 고심의 얼굴, 괴로움의 얼굴, 뭔가를 선택하기 전의 얼굴 등은 문학이 그리는 얼굴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늘 웃는 사람은 정말 즐거워 웃나?’라는 의문이 이는 것이다. 인류(인간이 지어낸 문자지만)가 생긴 이래 감정을 느끼는 인류가 직립보행을 했던 시절을 상상해보자. 그들은 슬펐을까? 슬펐다고 가정은 하지만 그들이 슬펐는지는 2011년 지금 누구도 모른다. 오로지 상상이다. 과학의 한계라고 믿었지만 그 직립보행인들이 만든 조상의 무덤이 나타면서, 슬픔은 인류가 아닌 동물까지 느껴왔음이 증명 됐다. 시간나면 정시뉴스를 보라. 전파가 생긴 이후로 우는 사람은 매일 보지 않나? 우는 뉴스는 특종이라고 우대를 받아 살인이나 학살을 보도한 기자는 상을 받는다. 그러나 웃고 행복한 사람들을 보도하는 기자는 개털이다. 사고가 나서 울고, 통곡에 합동장례식에……. 늘 지겹도록 죽어나간다. 왜 죽이고 죽는 일들이 방송분량에 더 많이 등장하는지 참 거시기 하다.

[승합차가 골짜기에서 뒤집어져 탑승자가 죽은 걸 400Km이상 떨어진 성도 이름도 모르는 내가 왜 알아야 하나? 내가 그들의 죽음을 알아서 무엇에 쓸 겐가? 울산 공장에서 가스 폭발이 일어났다. 8명이 죽었고 몇 명이 중태라는 사실을 왜 안산에 사는 내가 알아야 하나. 한마디 더할까? 내 아버지 죽은 건 왜 방송 안하니? 썩은 미디어에 중독된 썩어가는 뇌들. 미디어의 구분이 힘든 뇌들. 소소한 죽음까지 전 국민이 왜 알아야하나. 남들은 안 죽는데 그들만 죽었나?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도울 수 있거나 공감이 갈만한 죽음은 없다.]

그건 그렇고,

윗글들이 어떤가? 우는 사람을 위해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 되는 날,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어오는 날, 당신도 삶의 청사진은 전면 재설계로 들어설 게다. 2011년 지금도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는 통계가 나오잖나. 동병상련과는 거리가 멀다. 참으로 싫어하는 단어가 이 시대에 쓰는 동병상련이다. 나는 그들과 같이 병을 앓고 있지도 않고 같은 상황도 아니고 같은 성도 아니고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로 바꿔 생각해 “서로 다르지만 서로 위하는 일”로 바뀌어야 한다. 동병상련은 유래와 달리 퍼졌다. 오나라와 월나라의 이야기지 2011년에 쓸 말은 아니다. ‘오자서’가 오면 좀 물으련다. 몰려들라나?

자야것다.

그건그렇고 : 2011.11.15. 00:03 윤영환